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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시각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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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野 孤 寶 2014. 5. 2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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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의 의미 구분 : 시각적 의미 - 도상 icon, 상징 symbol

                               지시적 의미 - 지표 index

              

           '도상'과 '상징'은 현실의 모방으로서 현실의 사물들, 인물들, 외형들, 개념들, 코드들이 재현되는 현실의 거울.



* 닮음(icon), 인식(symbol), 인덱스(index)의 사진적 접근을 해서

 찍을 때 어떻게 찍어야 하나?


1. 대상이 있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찍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2. 찍기 전에 대상에 대한 나의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어떤 의미가 부여되어 이야기 하려고 하는지?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다.



* 사진에서 새로운 시각적 의미를 갖기 위한 형상화 방법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느끼게 해 주는 사진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사진


- 일부의 표정

- 특징적인 부분

- 구체적인 사실을 없애고 느낌만으로 전달하기, 즉 흔들기, 초점흐리기

- 주제와 연관된 소재를 적절히 연계지을 수 있는 능력

- 부분적 디테일을 강조하여  사람이 인지하지 못함을 보여 줄 수 있는 것(미니멀)

- 평범함으로 부터 특별함을 찾아내는 것, 

   즉 사물로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자연의 연초록은 찬란하지만,

지탱하기 제일 힘든 색.

그 떡잎은 꽃이지만,

한 시간이나 갈까.

조만간 잎이 잎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빠지고,

새벽은 한낮이 된다.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 위는 2014-5-25 광주 가톨릭평생교육원 박찬호선생 강의록 중에서 발췌함. ======================




                                                                                                                                                                           <구슬픈 구시포 해변> 2014-2-5-25




사진 철학의 귀중한 지침서

사진에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전적으로 빌렘 플루서가 말했던 의미 작용 때문이다. 사진의 의미 작용이 종잡을 수 없이 자의적이고 늘 의미의 울타리를 두텁게 치기 때문에 그것들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혹은 뛰어 넘기 위해서 철학과 만나야 한다. 
  
혹자는 사진에 무슨 철학이 필요할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고, 사진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찍었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각 매체는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런 측면이 사진에서는 쉽게 드러난다. 확실히 사진은 환영적인 그림과 달리 누구나 사진을 보면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찍혀진 형상의 구체성에 의해 무엇을 나타냈는지 알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진정 사진이 다른 시각 예술보다 의미를 알기 쉬운지, 혹시 우리가 알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가 삶 속에서 알고 있는 사물의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형상의 유사성을 두고 그것을 의미와 혼동하고 있지 않은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아니다. 인화지 위에 무엇이 찍혀 있는가를 안다는 것일 뿐, 그것은 카메라가 눈에 보이는 사물과 똑 같이, 마치 판박이처럼 유사 닮음을 제공했을 따름이지, 그것이 사진의 의미로서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의미는 매우 혼란스럽고 언어만큼 자의성을 갖는다. 현실을 노출하면서도 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 단적인 예이다. 
  
사진평론가 이경률이 편찬한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마실 출판사, 2002)는 의미의 객관화, 고정불변의 의미를 거부한다. 재현된 의미보다 의미 이전의 존재의 인덱스를 주장한다. 
  
 이 책은 그것들을 말하고자 한다. 사진의 무수한 의미들과 그 의미들로부터 생성된 이미지의 파편들이 궁극적으로 사진에 어떠한 철학적 인식론을 유도하고 또한 기호론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싶어한 책이다. 저자의 풍요로운 지적 배경과 탄탄한 논리 그러면서도 충분한 이해를 도모하는 여유로움의 책이다. 
  
이제껏 강단에서만 논의되거나 떠돌아다녔던 사진의 존재론, 사진의 의미론, 그리고 기호학적 사진과 현상학적 사진에 이르기까지 유용한 사진 철학의 지침서로 자리할만 한다. 
  
물론 지금까지 사진에 관한 철학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번역된 텍스트였거나, 출처 없는 글, 인용부호 없는 글로서 피상적으로 사진의 해석, 사진의 분석, 사진의 의미 작용에 다가갔던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진으로서의 철학’ 혹은 ‘철학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주석 있는 책, 인용 가능한 책으로서 사진 철학의 방향타가 될 것이 틀림없다. 
  
책은 사진적 재현을 중심 축으로 의미의 생성 과정과 지시 작용 그리고 수용 과정을 탐색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사진은 이런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또한 ‘사진은 이것들을 재현한다’고 명료한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철학이 답을 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학문인 것처럼, 이 책도 시종일관 사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것들의 인덱스적인 특징과 그것들에 내재한 이데올로기적인 출현 양태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저자가 중요시하는 것은 사진, 존재, 인덱스이다. 이러한 명제들 사이로 때론 직렬 회로로, 때론 병렬회로로 상호 연결하면서 그가 제시한 열 가지 테마 속에 그것들이 암시되거나 누설된다.  
  
테마 하나,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이 테마에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를 묻는다. 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그림자 연극>에까지 동전의 양면처럼 인식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 믿음의 세계와 추측의 세계, 확신적 앎과 상상적 추론의 관계를 투사한다. 그리하여 읽혀지는 영역보다 읽혀지지 않는 영역, 단지 지표(index)로서 암시되고 혹은 누설되는 드러나지 않는 영역을 더 중요시한다. 사진이 빛(알 수 있는 것)과 어둠(알 수 없는 것)의 조화라고 했을 때 진정 사진의 의미를사 일깨우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둠의 저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테마 둘, 장님과 코끼리 그리고 지팡이 
  
이 테마에서는 인덱스로서의 사진, 특히 퍼스의 기호론을 차용하여 사진의 인덱스적 특성이야말로 사진의 고유한 의미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지팡이로 코끼리를 만지는 의미의 불확실성을 거론한다. 
  
 장님이 마치 자신의 지팡이(즉 손에 전달되는 감각의 도구)를 이용하여 거기에 전달되는 감각 신호로부터 코끼리라는 하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처럼, 사진도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전체를 파악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사진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조형적 조합에 의해 암시되는 대상일 뿐임을 주지시킨다. 그는 사진의 의미를  ‘사진적인 것’으로 귀속시킨다. “사진이 외시하는 사실주의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하나의 징후로서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적 신호”로서 자리할 뿐이라는 것이다. 
  
테마 셋,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 
  
이 테마에서는 사진적인 것, 혹은 사진적 사실주의에 작용하는 모호한 맹점들과 그것들이 전적으로 사진이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서 나타나는 상징적 요소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사진적 사실주의에 있어 일반적으로 내시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 달려 있다: 함축적 메시지인 내시가 증폭되면 사진 메시지는 모호해지고 반대로 축소되면 메시지는 분명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의 논지는 사진이 외시적이 되면 의미는 내시니까 모호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미를 명료히 하기 위해서는 외시가 약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한다. 
  
내시를 무력화시키는 사진적 경향으로서 그는 사실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쇼크 사진을 든다. 그러면서 회화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외시적으로 표명하지만 이와는 달리 사진적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의 절대적 닮음 외는 어떠한 번역도 허락치 않기 때문에 탈코드화 된 사진 혹은 출현 방식이 저마다 다른 사진의 의미는 종종 사진 설명과 비평적 텍스트에 의해 엉뚱한 의미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테마 넷, 사진과 아우라 현상 
  
이 테마에서부터 사진의 철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해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잘 알려진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앙드레 바젱의 자동생성이 인덱스와 의미 사이에서 때론 직렬, 때론 병렬 회로를 통해 어떻게 의미망을 축조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진과 아우라 현상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서 출발한다. 발터 벤야민처럼 저자 또한 아우라의 개념을 통한 의미의 출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아우라는 인식론적 관점과 존재론적 관점 사이에서 인식론적 관점은 물리적 현상을, 존재론적 관점은 심리적 효과를 겨냥한다고 한다 
  
. 사진은 긍극적으로 물리적, 심리적 효과에 빚지는 독특한 음색임을 밝히는 것이다. 아우라가 이미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외시하는 대상과 분위기로부터 전염되는 응시자(관객)의 심정적 연상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규명 불가능한 사진의 의미야말로 아우라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테마 다섯, 스투디움과 푼크툼 
  
이 테마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를 단초로 하여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확장하여 사진의 복잡한 의미망에 다가서고 있다. 
  
벤야민에서 바르트로 연결되는 사진 철학의 연결 고리를 잘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핵심 부분인 스투디움적 요소와 푼크툼적인 요소를 외시적인 스투디움적인 형상 그리고 내시적인 품크툼적인 의미 생성으로 이분화 한다. 
  
그는 푼크툼이 사진과 관객 간의 의미작용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푼크툼의 의미가 재현 대상의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순간적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의미생성, 즉 아우라의 출현으로서 본다. 바로 이 지점이 벤야민과 바르트가 만나는 접점임을 보여준다. 
  
테마 여섯,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다. 
  
이 테마에서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의 죽음”,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으로서 사진의 의미를 슬쩍 누설한다. 사진에는 기억과 망각에 의한 존재성과 부재성이 있고 이것들이 사진의 절대적 연상과 직감의 상호작용을 통한 철학적 함의를 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테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끌어오는 것은 기억이라는 존재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즉 기억은 어떤 분명한 물질적 증거 없이도 현상에 대한 본질을 수용하는 존재론적 방법론이라고 말한다. 
  
그 적절한 본보기를 무의식과 기억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사진은 의식과 무의식, 지각과 기억, 의미와 무의미라는 이중적 의미구조이다. 특히 창작 사진에서 그것들은 단순한 코드나 상징 관계가 아니라 규명할 수 없는 어떤 심층적 실체의 지표로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의 그 존재론적 인덱스가 다시 한번 환기되는 부분이다. 
  
테마 일곱, 사진-인덱스와 존재의 증거 
  
이 테마에서는 다양한 기호론적 차원에서 사진의 인덱스적 요소와 이를 통해 인식되는 존재와 부재 혹은 존재의 암시에 대해서 말한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앙드레 바젱의 ‘자동생성’, 필립 뒤바의 ‘사진적 행위’, 로잘린드 클라우스의 ‘사진적인 것’을 통해 저자는 부재한 사물의 자리에 반드시 자리하는, 그러나 감지되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영혼적 존재의 증거를 들이 대며, 이때의 인덱스는 사진적 장치에 의해 찍혀진 존재의 자국이자 흔적으로서 사진은 찍혀진 그 형상의 조합에 의해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형상이 존재했음 통해 의미를 발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테마 여덟, 공유된 주관성과 감각의 뇌관 
  
이 테마에서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를 차용하여 인식의 주관성과 감각의 생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우리의 일상의 불특정한 지표들 또한 개인의 주관적 감성 속에서 출현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대부분 이러한 관객과 교차되는 경험에 관계하며, 바로 사진은 우리의 경험과 상황의 만남으로서 의미의 문턱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는 듀안 마이클의 사진을 통해서 작가는 직감과 감성에 의해 번역되지만 사진은 대상의 복사적 진술에 의한 징후 즉 생성의 누설로만 허락될 뿐이라고 "의미 이전의 인덱스"를 재차 강조한다. 창작의 관점에서 사진의 인덱스는 사진의 객관화되기 어려운 주관적 특성, 감각의 뇌관이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테마 아홉, 사진적 행위와 감성의 음색 
  
이 테마에서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이끌어서 사진적 행위란 하나의 사건(일회적인 것, 순간적인 것으로서 시뮬라크르)으로서 철학적 대상임을 말한다. 즉 사진은 작가의 주관, 작가 고유의 감성적 음색으로서 작품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자 의미 생성의 요체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진정한 예술 사진은 언제나 문화적 관습에 익숙한 대중의 눈에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는 뜻과 같음을 저자는 말한다. 
  
테마 열, 형상 이탈과 계열 분화 
  
마지막 테마는 상당히 난해하다. 이론적 논의를 미술의 영역까지 이끌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형상과 양식을 전면에 두고 그것을 바라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해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재에 대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전자의 경우가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새로운 양식(형상 이탈적)으로, 후자는 생성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후기 구조주의(계열 분화)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테마의 종착역에 이르러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구조 없는 존재들) 즉 시뮬라크르”와 같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는 사진적 재현의 방법론과 그 재현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관점을 철학의 영역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저널리스틱한 문체, 저널리스틱한 주제를 꾸려 왔던 사진 텍스트들에 비해 사진에 대한, 이미지 생성에 대한 긴 호흡, 깊은 호흡을 갖게 한다. 다만 이 책의 아쉬움이라면 사진의 현실적인 생산방식과 소비방식에서 비껴난다는 점이며, 사진의 현실적인 소통체계보다는 형이상학적 아카데미즘과 예술지향의 창작 사진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퍼스의 인덱스, 들뢰즈의 사건, 의미, 감각론에 의존함으로써 오늘날 문화 산업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매체미학적 특징을 생략했다는 점이다. 이 책이 사진의 철학을 논술했다는 점에서 빌렘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와 유사하나 플루서의 책이 사진의 문화적 양태는 물론이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장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글·진동선 (사진평론가 )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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