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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나들이

by 野 孤 寶 2013. 3. 3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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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마루 한가운데 그가 즐겨 앉는
의자가 안 보이고 원목의 의자에 어울리는
책상이 안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장본의
노트가 안 보이고 언제나 뚜껑을 열어 놓은
고급 만년필이 안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꺠알같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씨가 안 보이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릿결을 내맡기는
그녀가 안 보인다 햇살 고운 그녀와
아침마다 잎을 떨구는 초록의 나무가
안 보이고 묵묵히 초록나무를 키워온
환한 빛의 화분이 안 보인다 너무 환해서
웃음까지 삼켜버린 둘의 사진이 안 보이고
영영 안 보이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의 어깨가 안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오랜 손길이 안 보이고
아무도 없는 마루를 저 혼자 떠도는
먼지가 안 보인다 문이 열리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의 빈방이
안 보인다
- 김언,「숨쉬는 무덤」전문,『숨쉬는 무덤』,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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