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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서간

野 孤 寶

by 野 孤 寶 2013. 5. 3. 12:10

본문

야고보서 입문
 

야고보서는 언뜻 볼 때에 특이하거나 신비로운 면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서간 역시 당시에 통용되던 서한체로 시작하는데, 먼저 서신을 보내는 이가 자기 이름을 밝힌다. 이어서 필자가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 말을 구사한다. 2장과 3장에는, 당시의 대중 철학에서 가끔 이용하던 문학 유형으로, ‘디아트리베(diatribhj)’라고 불리는 생생한 연설조로 쓰인 여러 가지 짧은 설명도 나온다. 그리고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에는 줄곧, 히브리 말로 쓰인 본문이 아니라 그리스 말로 번역된 칠십인역을 이용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문헌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쓰였음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필자는 2,14-26에서 바오로의 교리와 관련하여 논쟁을 펼친다.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바오로의 교리를 바탕으로 실천은 아예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맹렬히 논박한다. 이로써,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이 큰 성공을 거둔 1세기 중엽 이후에 이 문헌이 쓰였다고 확실히 추정할 수 있다. 반면에, 정치는 조금도 시사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다 지방에서 독립 항쟁이 일어나고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66-70년과 그 이후의 십여 년은 저술 시기에서 배제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야고보서에는 바오로와 요한의 서간들의 가치와 매력을 드높이는 교리 설명에 비견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물론 그 서간들이 지닌 여러 가지 어려움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야고보서는 때로 진부하기까지 하고 게다가 대부분 당시의 헬레니즘 도덕에서 빌려 온 교훈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1. 야고보서의 문제
 
야고보서가 이렇게 전반적으로 명백하게 보이지만, 그 뒤에는 여러 가지 난해한 문제가 숨겨져 있다. 교회 전통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 부여하던 것과 같은 권위를 야고보서에도 인정하는 것을 가끔 주저하였다. 베드로 1서와 요한 1서는 1세기부터 모든 사람에게 성서로 인정을 받는다. 반면에 야고보서는 3세기 초엽에 와서야 비로소 신약성서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 뒤 동방에서는 야고보서의 경전성에 관하여 거의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만, 서방에서는 오랜 논쟁 끝에 4세기 말에야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얻게 된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 루터가 이 서간을 둘러싼 논의에 다시 불을 지핀다. 그는 이 서간의 교리가 ‘사도적(使徒的)’인 면에서 매우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루터는 가끔 이 서간을 그리스도교 경전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 유다교 문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통하여 이 서간이 그리스도교 성서로 인정받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에는 큰 흐름이 여럿 있었는데, 야고보서는 그 안에 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서간은 전통적으로 “주님의 동생”(갈라 1,19 각주 참조) 야고보가 쓴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야고보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는(마르 3,18과 병행구) 다른 인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사도 12,17; 15,13-21; 21,18-25; 갈라 1,19; 2,9.12 참조) 순수한 팔레스티나 사람으로 그리스 문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특히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II, 23,4-18 참조). 이러한 야고보가 이 서간처럼 그리스적인 성격이 명백한 작품을 썼으리라고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 그대로 이 서간을 직접 집필하였다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 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전통적 견해는 매우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제쳐 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견해는 야고보서가 전체적으로 다 그리스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사실 이 서간에서도 셈족 말식의 어휘나 문법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 말로 된 칠십인역의 영향 때문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특히 1장과 4-5장에서는 성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수한 표현 방식이 많이 쓰인다. 짧은 문장들이 이어지는데, 그것들이 앞뒤에서 똑같이 나오는 동일한 낱말로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헬레니즘 문학 규범에 별로 부합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리고 야고보서는 집회서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는 성서의 지혜 문학서들과 접촉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종말론의 여러 주제,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심판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2,12-13; 4,12; 5,9-12) 팔레스티나의 유다교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 서간에 자기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가 그리스 말을 모국어로 하는 비서에게 자기 가르침에 따라 자기 이름으로 이 서간을 집필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학자들은 앞의 것보다 개연성이 더 큰 다른 가설을 제시한다. 곧 야고보의 어록 같은 것이 전승되었는데, 규모가 훨씬 작기는 하지만 공관 복음서 전통과 비교할 수 있는 이 전통을 어떤 저술가가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술가는 유명한 인물의 이름으로 글을 내는 당시의 문학 관습에 따라 이 문헌을 “주님의 동생” 야고보의 작품으로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맞을 경우, 야고보서의 집필 시기를 80-90년으로 잡게 된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야고보서의 수신인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민감한 문제를 지적한다. 이 서신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1,1).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유다인들이 야고보서의 수신인이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 두 번 언급되는데(1,1과 2,1), 그것도 그냥 스치듯 지나가 버린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서가 본디는 순전히 유다교적인 문서였는데 후대에 이를 그리스도교 문헌으로 만들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덧붙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당히 모험적인 이 가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가설로는 2,14-26, 곧 유다교와 전혀 관련 없이 바오로 이후에 전개된 그리스도교 교리 논쟁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필자가 그리스도인임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인인 필자가 그리스도께서 이토록 희미한 역할을 하는 글을 어떤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틀림없이 그리스 문화 속에 살면서도 자기들이 예전에 속하였던 유다교 회당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임에 틀림없다. 여기에는 그리스화한 유다인, 그 가운데에서도 에세네파의 경향을 지닌 유다인들도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에세네파에 관해서는 「마태오 복음서」 신약성서 입문, 33-34쪽 참조). 이는 그리스도인들과 에세네파 유다인들의 공통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일 때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곧 도덕적 법에 관한 열성, 이상화한 청빈, 강렬한 종말론적 고대, 구약성서에서 계시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등이다.
 

2. 집필 배경
 
그리스도인들과 에세네파의 경향을 지닌 유다인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이 공동으로 실천하는 윤리이다. 여기에서부터 야고보서가 도덕적 문제에 부여하는 우월적 중요성, 그리고 유다교적인 주제와 그리스적인 주제의 긴밀한 배합이 나온다. 이러한 배합을 통해서 야고보서의 교훈이 그리스계 유다교와 연계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고보서의 필자가 가르치는 윤리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도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전락한다는 뜻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윤리는 독창적인 면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이 서간을 돋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방식과 관련하여 2,1에서 3,12까지 펼쳐지는 세 가지 설명이 그러하다. 곧 신자들의 자리 배치(2,1-13), 한 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에게 악담하는 괴리의 극복(3,1-13), 그리고 전례에서 재확인되는 형제애에 이어져야 하는 구체적 실천이다(2,14-26). 이 세 단락에서는 바오로 계통일 것으로 여겨지는 몇몇 교회에서 일어난 나쁜 관습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논박이 전개된다. 이 교회들은 또한 유다교와 가장 완벽히 결별한 곳이었다. 야고보서가 제시하는 윤리의 또 다른 독창성은 부자들에 대한 극도로 엄격한 비판이다(1,9-11; 2,5-7; 4,13-17; 5,1-6). 이 비판은 부자들을 눈앞에 두고 직접 말로 하기에는 너무 치밀하고 강렬하다. 처음부터 글로 쓰였기 때문에 이러한 말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단락에 나오는 두세 가지 표현은 이 맹렬한 비판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일부 유력한 유다인들에게 가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2,6-7; 5,6).

그래서 야고보서의 필자는 두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하는 것 같다. 한쪽은, 너무 맹목적으로 바오로 사도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여러 교회이다. 또 다른 쪽은 부유한 유다인들이다. 이렇게 해 나아가면서, 필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수수한 신분의 유다인들을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에게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60-65년에도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80년 이후,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유다교 회당들이 바리사이적 유다교로 결집되기 시작하는 90년대 이전이 더 적절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대상으로 그리스 말을 쓰는 디아스포라 전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서간 자체는 지중해변의 가이사리아나 갈릴래아 호수변의 티베리아처럼, 팔레스티나 지방에 있으면서도 그리스 말을 쓰던 고을에서 집필되었을 수도 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분명하게 구분짓는 데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게 하였던 사고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일치 운동과 유다교-그리스도교의 화해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는 이 때에, 그리고 한 국가 안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벌어지기도 하고 국제적으로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더 뚜렷이 구분되는 이 시대에, 야고보서가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갈라진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양쪽으로 이 서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촉진된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개신교 쪽에서는 한때, 야고보서에는 복음적인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고(루터)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불충분하다고 하면서 이 서간을 경시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부정적인 자세가 바뀌었다. 가톨릭 쪽에서는 병자성사를 정당화하는 데에(5,14-15 참조), 그리고 더 유감스럽게도,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개신교의 교리를 논박하는 데에(2,14-26) 이 서간이 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3. 구 성
 
야고보서에서는 2,1과 3,13에서 확인되는 문체의 변화가 시사하는 것 외에는 확실한 구조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지점 사이에 펼쳐지는 서간의 중심 부분에는 상당히 일관성 있는 세 단락이 들어 있다. 이 세 단락은 내용과 형식의 공통성으로 결합된다. 내용상으로는, 셋 다 바오로 전통에 속하는 몇몇 교회에서 거행되는 경신례를 공통적으로 비판한다. 형식상으로는, 앞에서 말한 일종의 ‘도덕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트리베’라는 문학 유형에서 자주 쓰이는 수사학적 방식을 공통적으로 이용한다. 곧 청중을 부르는 것이라든가 질문하는 것, 그리고 가상의 대화 상대자와 토론을 벌이는 것 등이다. 반면에 1장에는 짧은 구절들이 명백한 순서 없이 나열되어 있다. 다만, 가끔 ‘연결 낱말’이 한 문장의 끝과 다음 문장의 시작을 이어 줄 따름이다. 3-4절의 “인내”, 4-5절의 “모자람”, 12-13절의 (그리스 말에서는 어근이 같은) “시련”과 “유혹”, 26-27절의 “신심” 등이다. 3,13에서 시작하는 셋째 부분은 더욱 잡다하다. 그 안에는 (4,1-10.13-17; 5,1-6.7-11처럼) 근거 제시가 빈약한 말이나 문맥과 직접 관련없는 문장이 차례 없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는 교훈 부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도 (물론 번역본에서는 재생시킬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이라든가 운율 있는 말마디 등 문체상의 여러 기교를 노련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이 무질서는 필자가 적어도 서간의 몇몇 부분에서 이용하는 전통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전통이 (산상 설교와 야고보서 사이의 숱한 병행구가 시사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이든 야고보의 어록이든, 그 자체에는 문학적 구조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필자 자신도 어떤 구조에 따라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이런 유형의 글에서는 전체적인 인상과 세부 사항의 질이 중요할 뿐 잘 다듬어진 구조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질서가 없다고 해서 힘이 없거나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37. 가톨릭(공동) 서간 (2) : 야고보 서간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신약은 구약에서 한걸음 더 내딛은 것이다. 시대관, 윤리관, 구원관도 모두 신약이 구약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래서 말 그대로 구약(舊約)이고 신약(新約)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약속, 묶음, 다발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성경이 있다. 바로 야고보 서간이다. 또한 이 야고보 서간은 특히 ‘실천’을 강조한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 1, 19)
 
믿음, 시련, 지혜, 그리고 시련과 유혹에 대해 간략히 앞부분을 서술한 야고보 사도는 바로 이어서“천천히 말하라”며‘실천’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성경들과 사뭇 다른 구성이다. 우리는 밥을 꼭꼭 싶어 먹어야 한다. 그리고 소화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역시 사람은 입(口)이 문제다.
 
아름다운 산에 올랐을 때는 그 산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참 맛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미술품을 감상할 때도, 뛰어난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을 접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린 내 머리와 가슴에 들어온 것을 천천히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음미한 것은 ‘천천히’(내적으로 차분한 상태에서)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바로 야고보 사도의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실천’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 22)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 14~16)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소용이 없다. 기도 생활은 실천하는 것이다. 기도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이성과 마음, 가슴, 영혼으로 출발해 실천으로 완성된다.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줄 순 있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을 보여줄 순 없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 실천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 첫 번째가 ‘말조심’이다. 우리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는 그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된다.(야고 3, 9 참조)
 
야고보 사도는 또 실천의 구체적 내용 중 하나로 ‘차별대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 1~13)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시절에 그랬지만 당시 빈부격차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만큼 당시에도 가난한 이들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자비심’(慈悲心)을 말한 것이다.
 
야고보 서간의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 성당 안에서 가난한 이들은 주눅든 신앙생활을 하고 돈 많은 이들은 어깨 펴고 신앙생활 하는 풍토는 반드시 바뀌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 ‘자만’도 문제다. “자랑은 다 악한 것”(야고 4, 16)이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우리들의 생명이란게 과연 무엇인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다. 우리는 단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야고 4, 13~15 참조)
이런 점을 고치기 위해 우리는 인내하고 침묵해야 한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야고 5, 7)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자만에 빠지고, 이웃을 차별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이웃을 존중하고, 스스로에 겸손하는 등 ‘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금 여기서’실천해야 한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가톨릭신문, 2007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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