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고 보 서
개 요
Ⅰ. 문학유형
야고보서의 내용은 신앙생활에 관한 훈계다. 1,2부터 마지막 대문까지 이 훈계에 속하지 않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설교집이나 교훈서로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수사학적 관점이나 문학적 표 현에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는 태도)
Ⅱ. 구 성
야고보서에서는 세 가지 주제를 비교적 장황히 거론하고 있는데 세가지 주제는 1)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문제(2,1-13), 2) 믿음과 실천의 문제(2,14-26), 3) 말 실수에 관한 경고(3,1-13) 등이다. 이와 같이 야고보서는 편지라기보다 세 가지의 짧은 설교와(2,1-3,13) 많은 단절어의 집성문으로 구성된 교훈서이다.
Ⅲ. 문 체
1) 세련된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2) `그리고‘라는 접속어로 계속 잇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한 명사를 만들고 또 이야 기하고 만들고 하는 식의 단절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3) 호소하는 어조이다.
※ 수사학적
①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다.
② 독자들에게 직접적 호소를 위해 명령어를 썼다.(4,7-8)
③ 2, 14 : 가상의 적대자가 반론을 제기한다.
④ 수사학적 질문들이 사용되었다.(2,6-7/14/17/3,11이하/4,1-5)
⑤ 질책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들이 있다.(2,20/4,4/4,8)
⑥ 비유 : 1,6-11/23-24/3,3-4/5/7/11-12/4,14/5,7)
⑦ 인용과 보기(구약으로 돌아옴)
⑧ 의인화(1,15/2,13/4,1/5,4)
⑨ 일정한 표현을 짝지음(4,15)
※ 셈어와 관련된 특징
① 셈어화된 단어와 표현양식을 사용(댓구법 1,5/9/11,13/3,9/4,8/9/5,4)
② 셈어화된 문장을 사용
③ 구약성서적 경향이 많이 나타남
④ 추상적 표현을 많이 사용
⑤ 대명사의 위치가 접미어처럼 위에 붙음
※ 유형과 표현방식
① 명령적 ② 직선적 ③ 도약적 ④ 비유를 즐겨 사용
Ⅳ. 저자와 수신
1) 저 자
예수님의 동기(동생) 야고보가 집필했을 것이라고 한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동기 말고도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나오지만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44년경에 처형되었고, 이 성경은 50-60년대에 활약한 바울로의 신학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저자일 수 없고 또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또한 사도였으나 이 성서의 인사말 가운데 사도라는 명칭이 없기 때문에 저자일 가능성이 희박하므로 예수님의 동기 야고보로 추측한다.(마르 13,55) 그는 예수님의 지상활동기간에는 다른 친형제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한 듯하나 예수님의 부활후에는 분명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첫 번째 공의회를 주재했던 것으로 보인다.(사도행전15장) 이 회의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음을 공고히 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야고보의 견해(2,14-16)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느 정도는 유대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울로가 모세율법을 폐하려 한다는 혐의를 벗도록 도왔다. 야고보 자신은 분명 유대교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후에 `의인 야고보‘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62년에 순교했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 앞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열두지파는 포로기를 거치면서 노예로 예속되거나 무역관계로 지중해 전역에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신약에서는 교회를 이스라엘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어쨌든 이 서신은 바울로의 서신들의 경우와는 달리 어느 특별한 회중에게 보낸 것은 아니다.
※ 열두지파 :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킴
※ 흩어져산다 : 세속을 초월하여 영적 나그네 생활을 하는 현세의 모든 그리스도인
※ 마르 6, 3 : 네 명의 주님의 형제 가운데 가장 먼저 지칭
마르 15, 40 : 작은 야고보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추측
마르 3, 21/31-35 : 예수님의 공생활을 이해 못함
Ⅴ. 집필동기
야고보는 당시 사람들이 바울로의 `믿으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을 곡해하여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신앙을 실천하는데는 전혀 노력하지 않는 이들을 염려하여 이 편지를 보냄.
Ⅵ. 구 분
1) Cladder : ① 서론, 개괄적 부분(1,26-27) ; 주제 제시
② 주제들이 역순으로 ; 2, 1 - 11 주제 1
2,12 - 26 주제 2
3, 1 - 14 주제 3
③ 동일한 주제들이 역순으로 ; 3, 15 - 18
4, 1 - 3
4, 4 - 8a
④ 결론적인 경고가 마지막에 따름
2) 하르트만 : 야고보가 자신의 권면을 창세 29, 35 / 18장의 야곱의 열두아들 이름을 연결. 선의 구성도 이에 상응
① 1, 2 - 18 르우벤 (주께서 나의 비참함을 돌아보셨다)
② 1, 19 - 25 시므온 (야훼께서 들으셨도다)
③ 1, 26 - 27 레위 (그가 내게 매달리니라)
④ 2, 1 - 11 유다 (내가 주를 찬양하리라)
⑤ 2, 12 - 26 단 ( 하느님께서 나를 두둔하셨다)
⑥ 3,1-18/4,1-12 납달리 (언어와 겨루는 하느님의 싸움을 치루어 이겼도다)
⑦ 4, 13 - 17 가드지파 (됐다, 이제 행운이 돌아왔구나)
⑧ 5, 1 - 3 아쎌 (모두가 나를 행복하다고 하리라)
⑨ 5, 4 - 6 이싸벨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셨도다)
⑩ 5, 7 - 11 즈불린 (내 남편이 나를 위해 주리라)
⑪ 5, 12 요셉 (주께서 더 주시기를..)
⑫ 5, 13 - 20 베냐멘 (내 고통의 아들)
3) 루스클러
사회적 갈등에 대한 그리스도적 해결
① 기초적, 교회적 대답 1, 2 - 29
② 실천적, 도덕적 대답 2, 1 - 3, 12
③ 결정적, 종말론적 대답 3, 13 - 5, 20
4) 게르트너
호세아 10, 2 그들의 마음을 갈라져 있다.
시편 12, 1 - 5을 본보기로 해서 구성되어 있다고 의견
① 1장 믿음 시편 12, 1 믿음
② 2장 믿음과 행위 시편 12, 2 현혹
③ 3장 혀 시편 12, 3 재잘하는 모든 혀
④ 4장 하느님을 대적함 시편 12, 4 누가 우리 주인이냐?
⑤ 5장 가난한자들이 억눌림 시편 12, 5 가난한 자들이 억눌리고
=> 시편 12, 1-5이 야고보서와 이야기하는 바는 같지만 야고보서가 그 구성을 따랐다고 하기는 무리이다.
제 1 과 한 마음인가, 두 마음인가?
읽기 : 야고보서 1, 1 - 18
구분 : 1. 인사 (1;1)
2. 시련을 통해 완성으로 (1:2-4)
3. 믿음의 기도 (1:5-8)
4. 가난한자와 부자 (1:9-11)
5. 시련과 유혹과 하느님의 선물 (1:12-18)
배움 1. 시련에 싸일 때 그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시오(1,2)라고 말하면서 야고보는 시련을 끈기있게 잘 참아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라 고 합니다. 지혜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2. 들꽃같은 부귀(1,10-11)에 드러난 야고보의 가난에 대한 자세는 어떠한가?
3. 자기 일만을 사랑함(1,11)이 믿음에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시련과 유혹과 하느님의 선물(1,12-18)
(1) 시련과 유혹은 어떻게 다르다고 야고보서는 가르치는가? (1,12-15)
(2) 시련을 겪거나 유혹을 받을 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1,5 ; 12-13)
(3) 하느님을 가장 선하시고 신뢰할만한 분(광체들의 아버지, 빛의 아버지)으로 믿을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1, 16-18)
묵상과 생활 1. 당신에게 인내와 성숙을 가져다 준 경험이 있었다면 함께 나누어 봅시다.
2. 당신이 돈이나 재물을 우선으로 생각할 때는 주로 어떤 때 였습니까?
3. 당신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시련이나 유혹에 대해 묵상해 보 고 야고보서 안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것에 어떻게 응답 할 것인가 나누어 봅시다.
기도지향 : 저희는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저희 모두가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힘입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지혜를 간청합시다.
배움 1.
☞ 시련은 이 서간의 주제중 하나이며 그것은 곧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이 신자를 교육하는 수단이다. (로마 5, 3-4 :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시 련과 인내를 연결시킨 것은 후대 유대교의 전통, 마카베오하 7장에서는 일곱아들이 죽어가는 가운 데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여인의 시련과 인내의 모습이 나타남)
시련으로 참된 신앙과 거짓신앙이 가려지게 된다. 시련을 수동적으로 참는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희 망을 가지고 꿋꿋이 견디어 내는 영웅적인 자세가 바로 `인내‘(ὑπομονήν)이다. `완전하다’(4절)라는 말은 일정한 목표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속세에서의 완전함이 아니라 종말론적 목표에서의 완전함을 의 미한다. → 현세에서 모든 것을 갖기 위해 시련을 겪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계에서 완전해야 한다.
지혜(σοφίας)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에 관한 일을 판단할줄 아는 지혜를 말한다(1고린 2,6참조). 지혜는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닌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지혜서에서 말함. 그러나 우리가 청하면 어렵게가 아니라 쉽게, 단순하게 주신다.
※ 지혜의 근간 :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
“믿음(πιστις)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구하는 것이 아닌 아주 자명한 믿음으로 전적 으로 신뢰하며 청함을 의미
배움 2.
☞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시오. 부자는 들에 핀 꽃처럼 사 라질 것입니다. 해가 떠서 그 불볕으로 풀을 말리자 그 꽃은 지고 그 아름다운 모양이 사라집니다.
가난은 야고보서 안에서 아주 심각하게 다루는 주제이며 그 가난 안에는 겸손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낮은형제는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라는 말씀은 낮음, 낮아짐, 겸손을 기준으로 한 말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이 모두 포함)은 행복하다(가난한 자는 믿음으로 부요하게 됨)는 말씀은 산상수훈과 연결되며 가난한 자는 하느님이 다가오실 여지를 많이 두게 되므로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부자는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다. 낮추어짐과 높여짐에 대한 얘기는 후에 2,5;5,1-6;5,7-11 에 나오게 된다.
※ 가난한 자 (야훼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
① 고아 : 돌볼사람이 없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대상
② 과부 : 여자 자체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이였는데 남편마저 사라진다면 친정에서도 이미 시집을 간 것이므로 아무도 보호자가 될 수 없음
③ 병자 :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들
※ 야고보는 당시의 전승에 따르면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려는 자세였다. 스승의 가난을 자신의 삶으로 체험하려 했기에 당대의 사람들 눈에는 매우 금욕적이며 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민감한 반응을 한다고 생각했을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야고보는 자신이 배웠던 그 가난의 기쁨을 잘 알기에 부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배움 3.
☞ 우리의 시선은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 시선을 주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둔다면 욕심이 생길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 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므로 불순종이 되고 불순종은 곧 믿음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 오직 일만을 생각한다면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어 만족도가 떨어짐.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음.
배움4. (1)
☞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12절의 `시련‘(πειρασμόν)과 13절의 `유혹’이 같은 낱말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느 님이 사람을 유혹한다는 말이 가끔 나온다.(신명 13,4 ; 2사무 24,1참조) 이런 표현은 아직 신개념이 미숙했던 탓이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을 유혹하여 악으로 이끌 수는 없다. 따라서 죄의 책임을 하느 님에게 돌려서는 안된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악한 것은 나 올 수 없다. 흔히 시련을 하느님이 주신다고 생각하지만 시련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하느 님이 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유혹하시거나 시련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축복해 주시는 분이다.
배움 4. (2)
☞ 시련을 받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주신다.
→ 이 구절은 이른바 행복선언문이다.(시편 1,1 ; 112,1 ; 잠언 8,34 ; 집회 14,1 ; 마태 5,3-12 = 루가 6,20-23참조)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 내는 사람이 종말에 받게 될 영생이다 (5,11 ; 마태 5,10-12 ; 1베드 3,14 ; 4,14 ; 사도 12,22)
배움4. (3)
☞ 광체들의 아버지 : 하느님은 빛의 근원으로서 해와 달, 그 밖의 별들도 그분이 만드셨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런 천체들은 그 운행에 따라 수시로 변하며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곤 하지만 하느님은 변함 없는 빛 자체이시며, 오직 선을 내리시는 분이다. 또한 훌륭한 모든 것과 완전한 모든 선물의 출처는 인간이나 지상의 그 무엇이 아닌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 선한 것에서부터 악한 것이 나올 수는 없다. 하느님은 온전한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므 로 하느님을 악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데서 완전히 탈피하라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어둠 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빛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다. 죄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가리워질 수 없는 것이다.
※ 첫열매(ἀπαρχὴν)는 세례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약에서는(출애굽,신명,레위기) 제사를 드릴 때 많이 쓰였던 단어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첫 아들이다. 곧 야훼의 거룩한 소유이고 첫 열매이다.
제 2 과 말, 말씀, 참된 경건함
읽기 : 1, 19-27
구분 : 1. 듣는 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올바른 전제조건들(1, 19 - 21)
2.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라 (1, 22 - 25)
3. 거짓된 경건함과 진정한 경건함 (1, 26 - 27)
배움 1. 말씀대로 실천하는 생활에 필요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 19 - 20)
2.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자세 (1,21)와 듣기만 하는 자와 행하는 자의 차이점을 대조해 봅시 다.(1,22 - 25)
3. 참된 경건함에서 침묵(혀를 다스림)과 실천(이웃의 고통을 돌 봄)과 수덕생활(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기를 지킴)이 조화를 이루려면 우리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26 - 27)
묵상과 생활 1. 야고보는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 (1, 20)고 했습니다. 자신의 분노로 공동체의 의를 이룰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묵상해 봅시다.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 유는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야고보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받아들이 지도 않은채 선한 일을 했을 때 야고보의 반응은 어떠했을 지 묵상해 봅시다.
기도지향 하느님의 말씀을 좀 더 잘 듣고 실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배움 1.
☞ “모든 사람은 듣는데는 빠르고 말하는데는 더디며 분노하는데도 더디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 라 다른 사람의 말을 참을성있게 들어라.
“분노(ὀργὴ)는 하느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 ; 부당한 판단, 경솔한 판단을 하지 않도록 천천히 해야 한 다. 이 구절은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말(단절어)인데, 필자가 19절 윗부분의 `분노한다‘는 말과 연관시 켜 이 자리에 삽입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의(義)’는 바울로가 말하는 의(갈라 2,16 ; 로마 1,17 ; 3,24)와 다르며 오히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의(5,6.10.20 ; 6,1.33)와 비슷하다. 야고보가 말하는 하느님의 의는 하느님의 뜻이 담긴 계명 특히 사랑의 계명과 그 계명을 따르는 생활을 가리킨다.(3,18참조 : 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 온유함(πραῢτητι을 요구)
※ 바울로가 말하는 의
갈라 2,16 :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1,17 :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 마태복음에 나오는 의
마태 5, 6 :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마태 5,10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 5,20 :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6, 1 :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바울로가 말하는 의(義)는 마음으로 비롯되는 것이나 이것은 오직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야고보는 행(行)함으로써 믿음을 드러낸다고 했고 그런 믿음으로써 의(義)로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다른 양상으로 외로움을 얻는 것으로 볼 수 있 으나 그 의로움을 무상으로 얻는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신실한 믿음만으로 의로 움을 얻는다는 것도 또 행함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중용이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은 바로 어느 한 부분에만 치우치는 편견이 아니라 중용의 길을 걷는 것인데 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무런 대가없이 무상으로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 바울로와 야고보가 대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만으로 기울 려고 하는 안일한 자세에 쐐기를 박는 것이고, 오직 행함만으로 그 행위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저버 리려는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한쌍의 木魚와 같다고 할까? (제 4과 배움1을 참조하라.)
배움 2.
☞ 더러운 모든 것과 넘치는 사악(과거)을 버리고 마음을 순하게 가져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받아들 이도록 해야 한다. (인간들의 자유로운 판단, 선택의 여자가 남음) 이 구절은 영세자들을 위한 훈계를 연 상시킨다.(1베드2,1 ; 로마13,12 ; 골로3,8 참조) ; 영세자들의 첫 마음(그리스도적, 구원론적, 윤리적 이야 기)을 유지하라. 이것이 곧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한 자세이다.
`뿌리내린 말씀‘은 18절의 `진리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사도들의 전통교리를 가리킨다. 히브리말의 “영혼” 은 생명체인 인간 전체를 뜻한다. 실천은 야고보서의 최대 관심사이다.
듣기만 하는 자 (말씀을 육화하지 못하는 자) |
행하는 자 (말씀을 육화하는 자) |
-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됨 -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즉시 그 생김새를 잊어버리 게 됨 -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기에 하느님 안에서 행 복이나 평화를 누릴수 없음 -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성숙되기 어려움 - 올바른 신앙인의 표양이 되지 못하여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영향을 미치기 힘듬 - 모래위에 집을짓는 어리석은 자
|
- 자신에게 떳떳하고 하느님 앞에 진솔한 모습을 보임 -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하느님의 의와 동일하지 않 음을 보게되면 자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함 -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림 -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성숙됨 - 올바른 신앙인이 표양이 되므로 행동으로 많은 이 웃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전도를 하는 결과가 됨 - 반석위에 집을 짓는 현명한 자 -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룸 |
하느님의 의지는 실현되기 위해 선포된다. 그러므로 1) 말씀을 들음 2)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임 3) 말 씀을 실천으로 행동함.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로마 2,13 : 율법을 듣는 자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이것 을 실천하는 자가 의롭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 로 듣기만 하면 아무 가치가 없다.
배움 3.
☞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해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경건함은 헛된 것 이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깨끗하고 흠없는 경건심은 고아와 과부들이 괴로움을 당할 때 찾아보며 세속 에 물들지 않게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속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개인적인 욕심을 의미함. `고아와 과부들‘은 곤란한 처지에서 억 압받는 사람들의 대표적 존재이므로 이런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가장 절실한 윤 리적, 종교적 요구였고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평가기준이 된다. 우리 자신이 경건하게 되기 위 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세속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자세와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자세를 닮아가기 위해 자비와 애덕을 실천해야 한다. 내 신앙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고 실행에 옮겨 그것이 내재화할 수 있도록 하여 완전한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항상 듣고 자신의 마음에 새 겨야 한다.
※ 야고보가 속해있던 공동생활은 팔레스티나 지역 안에서 생활한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계속 부 딪히는 이들은 유다인들이었다. 유다인은 율법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실행에 게으르므로 충 돌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싸움과 말다툼이 있었다. → 혀를 다스림(침묵)의 자세가 필요했었음
※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을 귀여겨 듣는 자세이며,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겸손의 자세 이다. 이렇게 들은 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함. 그것이 참된 행함이 된다. 자신의 그릇된 욕심으로 하느님의 뜻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덕생활의 근본이 되어 주는 것은 침묵이며 이 침묵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제 3 과 판단하는 자가 누구인가?
읽기 : 2, 1 - 13
구분 : 차별대우와 다가올 심판 (2,1 - 13)
1. 주제 도입의 권면 (2,1)
2. "예“ (2,2 - 3)
3. 수신인들에 대한 질문과 호소 (2,4 - 5a)
4. 긍정적인 답을 요구하는 세 가지 질문 (2, 5b - 7)
5. 근본적인 사항에 대한 교훈 (2,8 - 11)
6. 차별대우에 대한 종말론적 근거 (2,12 - 13)
배움 1. 야고보서는 우리가 이웃을 외모로 판단하며 차별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러합니까?
2. “자비(κρίσεως)는 심판(ἔλεος΄)을 이깁니다(κατακαυχαται)”(13b) 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활태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또 그 의미는 무엇인가 알아 봅시다.
묵상과 생활 1.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의 삶을 조명해 봅시다. 이를 따르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 화해야 할 지 작은 결심을 해 봅시다.
2. 어떤 의미에서 율법 하나를 어기는 것이 온 율법을 어기는 것 만큼의 심각한 일인가? 생활 속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찾아보자.
기도지향 보여지고 드러나는 모습으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도 록 간청합시다.
배움 1.
☞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시어 신앙의 부자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 하신 왕국의 상속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2,1 - 13에서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문제를 비교적 자세히 다룬다. 그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을 두둔하는데 이는 1, 27에서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라고 한 훈계와 상통한다(집회 35,11-22 참조). 여기서 말하는 부자들은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유대인과 이방 인 부유층을 말하며 화려하게 입은 사람이 영광스러워 보이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영광스럽게 보시지 않 는다. 이런 부자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여(선택) 이미 이 지상에서 많은 영적 선물 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누구보다도 먼저 장차 올 하느님 나라의 부를 약속받았다.(1,12 ; 마태11,5 = 루 가 7,22 ; 루가 12,32-34 ; 14,21 ; 16,9-31 참조)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별하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자로 자처하는 꼴이 된다. 하느님은 어떠한 것을 택하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가난한 자를 자유의지로 택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피조물로서 또 구원에로 불림을 받고 있는 죄인들로서 모두 평등하다. 하느님은 우 리의 마음을 보시지 외면적인 것을 보시지는 않는다. 우리의 행실은 하느님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당신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신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아 무것도 아닌 사람들”(1고린토 1,28)을 선택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결핍 때문에 인간구원의 필요성을 헤아리는데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에 특 히 민감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당신 구원의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 이러한 말들은 부자가 구 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으로 혜택받지 못하는 이들을 특히 사랑 하심을 누구나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난한 이들은 신앙의 부자임을 깨닫고 그런 사람으로 존경해 야 한다.
배움 2.
☞ 13b절의 뜻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심판을 면한다는 것이다.
(집회 3,30 ; 물은 뜨거운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 마태 5,7 ;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여기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에 하느님이 내리시는 단죄선고를 뜻한다. 사랑 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아무리 완전하게 덕을 베풀고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해도 하느님 앞에 나 설수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실 때에는 그처럼 너그럽고 자유로운 당신 자비의 기준에 따르신다. 그것은 당신의 자유에 속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사람에게 상이나 벌을 내리실 때에는 그 사람 자신이 다 른 이들을 판단할 때 사용한 기준을 따른다. 오직 사심없고 관대한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랑에 대하여 너그럽게 갚으실 것이다. 비록 그런 사랑을 실천한 이가 다른 면에서 하느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런 갚음이 있을 것이다.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는 말은 구 약성서에서도 널리 인정된 원리이다. 심판을 받게되는 원인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을 거슬렀기에 심판을 받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왕도의 법(사랑)을 어기 는 것이 된다.(요한 12, 31) 하느님의 윤리적 의지는 하나이고 다르지 않고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제 4 과 믿음이 있다면, 행함도 있어야
읽기 : 2, 14 - 26 (야고보서에서 가장 핵심)
구분 : 믿음과 선행
1. 행동없는 믿음은 무익하다 (2,14-20)
2. 구약성서로부터의 근거 제시 (2,21 - 26)
배움 1. 행함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소용이 없다(14-19)고 합니다. 그 이 유를 야고보는 무엇이라 합니까?
2. 야고보는 구약의 2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 음이 완성됨을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 봅시다. (20 - 25)
3. 26절의 비유의 의미를 알아봅시다.
묵상과생활 1. 당신의 행위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는가?
2. 당신의 행위가 믿음과 좀 더 일치할 수 있으려면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겠는가?
기도지향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갖도록 기도합시다.
배움 1.
☞ 누가 믿음(πίςτιν)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ἔργα)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떨어진 형제나 자매가 있는 경우에 여러분 중에 누가 그들 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하면서도 몸에 필요한 것을 대주지 않으 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함이 없다면 그 자체로서는 죽은 것입니다.
=> 여기에서 야고보는 행동이 없는 믿음에 대해 확실히 얘기하고 있다. 유일신론적인 믿음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뜻이며 야고보가 말하는 행동은 율법의 일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행동이고 곤경가운 데 돕는 행위이다. 결국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진정한 믿음의 실천이 아니니 행동과 함께 믿 음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아마 초대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집단 적으로는 아니어도 많이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17절과 18절 사이에 너는 행동을 하는 모양 인데 네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종류의 질문이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로의 믿음(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만이 제대로 된 믿음으로 착각할 수 있 는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에게 믿음만 강조하고 애덕을 소홀히 하므로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바울로의 논리를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고 바울로의 믿음을 실천으로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다.
※ 바울로와 야고보의 믿음에 관한 가르침
믿음만으로 구원된다고 한 바울로의 가르침(로마서 3-4장 ; 갈라디아 3-4장)을 왜곡한 주석에 대하여 야고보가 이를 바로 잡으려 했었다. 그러나 바울로 자신은 이미 그런 왜곡을 반대한 적이 있다.(로마 서 6,1-23) 야고보는, 사람을 인도하여 그의 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지 않는 믿음은 소용없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런 신앙은 사람을 구원받게 할 수 없다. 한편 바울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곧 사람은 그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율법의 모든 규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써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고 하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론을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죄인이 구원에 이 르자면 그 자신의 노력으로써는 불가능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믿음이 필요함을 분명히 밝혀야 했다. 이 와 동시에 그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안심하고 나설 수 있기 위해서는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믿음의 결실을 살펴보고 이에 따라 신자에게 상이나 벌을 내리신다고 가르친다.
배움 2.
☞ 아브라함의 사례에서 야고보는 자기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끌어댄다. 주목할만한 것은 그가 같은 아브라함을 두고 바울로와(로마 4장, 갈라 3,6-9) 반대의 결론을 내리게 된 점이다. 야고 보는 유대교의 고전적 인물인 아브라함을 `아버지‘(마태 3,9 ; 루가 16, 24.27.30 ; 요한 8,39.53 ; 로마24, 16-18) 그리고 `하느님의 친구’(2역대 20, 7 ; 이사 41, 8)라는 전통적 명칭으로 부른다.
※ 하느님의 친구(δικαίους) : `의인‘이라고 불리는 단어보다 그 의미를 능가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 계(우정, 사랑을 나누는 밀접한 관계)를 뜻한다.
야고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헌은 그의 신앙을 보여주는 실천이었다. 그는 창세 5, 6과 창세 22장을 결부시킨다. 반면에 바울로는 창세 15, 6에 의거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이 할례나 율법 따위의 행 업을 앞서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야고보의 주장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침으로써 자기 신앙을 행 동으로 입증하여 의롭게(의롭다함은 행동으로 말미암는다) 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해석은 유대교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집회44,20 ; 1마카2,52 ; 히브11,17) 아브라함은 신앙의 시험을 받았을 때, 오로지 하느 님의 뜻을 따른 결과 과거 자신에게 약속된 적이 있는 의(義)를(창세 15,6 ; 인정받음) 완성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 22, 16-18에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축복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함과 복종, 순종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다. 야고 2,21절의 이야기와 창세기 22장의 인용구는 창세기 15, 6의 성취가 무엇인지 얘기해 준다. 22절은 야고보서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믿음과 행함 의 일치(결합)와 그 상호보완성을 분명히 밝히는 부분이며 믿음은 역동적이며 사랑, 하느님에 대한 순명으 로 복종이라는 경향을 통해서 완성됨을 이야기한다. 결국 행동이 믿음과 함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 라 거꾸로 믿음과 행동이 함께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야고보에게도 믿음이 1차적인 것이고 믿 음과 행함의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며 병행만이 있을수 있다는 결론이다.
24절은 바울로의 가르침(로마 3,28 ; 갈라 2,16)과 정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로 사 도는 할례, 안식일, 금식같은 유대교 율법의 특수한 행동을 비판하였지, 실천없은 믿음을 주장하지는 않았 던 것이다. 24절의 `믿음만으로‘라는 표현을 보면 앞의 `행함’에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조리있게 밝힌 야고보의 말을 참작하면 바울로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피할수 있 을 것이다.
히브 11,31에서 라합의 믿음을 칭찬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기 보다는 행함 의 모범으로 끌어댄다. 그녀는 첫 번째 행함으로 이스라엘의 정탐원들을 고발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두 번째 행함으로 나쁜 곳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내었던 것이다. 결국 라합이 구제받은 것은 오로지 믿 음으로 나타내 보인 선행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죄인의 처지에 있을 때까지도 믿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암시해 준다. 결론적으로 믿음과 행함의 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잘못 생각하는 자에 대한 호소 : 너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아서 안다.
- 믿음이 그의 행동과 함께 힘을 발휘하였다.
- 행함으로 믿음이 완성된다는 것
-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다는 성서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
※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과 하느님과의 위치에 받은 그의 결론
- 그리고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친구로 불리어졌다.
배움 3.
☞ “영이 없으면 육체가 죽은 것과 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선행‘의 논의를 요약한다. 양자의 비유가 지닌 요점은 죽음이다. 어느 육신이 죽었다면 생명을 주는 영혼도 이제는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따르지 않 는 믿음에는 살아 있는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살아있지 않는 믿음, 사람의 행실에 아 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믿음은 구원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시체들이 어서, 하느님 앞에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심판하러 돌아오실 때, 이와 같은 신앙을 가 진 사람들을 준엄하게 정리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 7,23) 비록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가지고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이러한 판정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종 야고보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과 라합 처럼 그분과 하나가 되었음을 생각하고 그분의 재림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제 5 과 혀의 파괴력
읽기 : 3, 1 - 12
구분 : 1. 완전한 사람이란? (3,1 - 2)
2. 길들이기 힘든 혀 (3,3 - 8)
3. 혀의 이중성 (3,9 - 12)
배움 1. 야고보는 교사가 되지 말라고 하면서 말의 실수가 없는 완전한 사람 이 되라고 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3,1-2)
2. 작은 지체인 혀가 길들여지기 힘든 까닭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의 비유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 3 - 8)
3. 야고보는 비유를 통해 `혀의 이중성(두개의 혀)‘을 드러냅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합니까? (3,9-12)
묵상화 생활 1.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데 하느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혀를 다스리려면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 지 묵상 해 봅시다.
2. 하느님과 이웃을 더 잘 찬양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 력이 필요할 지 묵상해 봅시다.
기도지향 우리의 혀가 이중성을 갖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해 주십시오.
배움 1.
☞ 우리는 더 엄한 심판(κρίμ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많은 실수를 범합니다. 누가 말에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τέλειος ἀνὴρ)이라 온 몸도 다스릴 줄 압니다.
중심부분(2,1 - 3,12)의 셋째주제는 말의 절제이다. 야고보는 이미 1, 26에서 언급했던 문제를 여기서 다 시 정열적으로 거론한다. 혀도 죄를 짓지 말라는 훈계는 실천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보는 야고보의 깊 은 염려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는 여기서 특히 예배모임을 두고 훈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선 설교와 토의 때 말조심하라는 것이다. 당시 교회에서 교사들은 응분의 은사를 받은 신분에 속했다.(로마 12, 7 ; 1고린 12, 28 - 29 ; 에페 4,7 참조) `우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필자도 교사의 한 사람이다. 교사들의 책임은 무겁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남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 의무를 게을리할 경우,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루가 12,48 ; 20,47) 야고보가 특히 염려하는 것은 교사들이 가르치다가 말 실수 를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교사뿐 아니라 교사인 양 자기의견을 너무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에게도 해당 되는 경고이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게 되면 해서는 안될 이야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게 되므로 항상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단순히 말만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아닌 말로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의도이며 자신들의 이야기로 그리스도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 다. 말실수를 피하고(잠언 10, 19 ; 말이 많으면 실수를 안할 수가 없다. 반면 자신의 혀를 지배하는 사람은 지혜롭다) 혀를 잘 다스리는 것은(잠언 13,3 ; 집회 14,1 ; 25,8 ; 시편 39,1) 구약 지혜사상의 중 요한 주제다.
배움 2.
☞ 우리가 말들을 부리기 위해 그 입에 재갈을 물리면 그 온 몸뚱이를 몰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들을 보시오. 그렇게 큰 것들이 거센 바람에 몰리더라도 아주 작은 키 하나로 키잡이가 원하는 방향을 잡아 움직여 갑니다. 이와같이 혀도 하나의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자랑만은 대단합니다. 보시오. 그토록 작은 불이 그토록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혀도 하나의 불입니다. 그 혀는 우리 지체 가운데 불의의 세계로서 들어앉아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를 태우면서 스스로도 지옥불(γεέννης(地名) ; 더러운 악취, 분비물들이 항상 불타고 있는 지역으로 지옥불을 가리킴) 에 타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고기들은 인류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으며 사실 길들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혀를 길들일 수는 없습니다. 혀는 쉴새없이 움직이는 고약한 것이며 죽이는 독약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자랑만은 대답합니다” - μεγάλα αὐχεί를 직역하면 “큰 일들을 자랑합니다”이다. 비유에 나오는 재갈 (χαλινοὺς)과 키(πηδαλίου)는 주로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이지만, 6-8절을 보면 혀(γλώσσαν)의 효과(= 혀 가 자랑하는 일) 가운에 야고보는 주로 좋지 않은 점을 생각한 것이다.
`인생 대신 `생김‘ 또는 `현존’이라 번역할 수도 있다. “인생의 수레바퀴”(τὸν τροχὸν τής γενέσεως)라는 표현은 윤회론을 연상시킨다. 잘 다스려지지 않는 혀는 온 인간세계를 불처럼 태운다. 또한 혀는 거짓 말로 세상을 더럽히니 `불의의 세계‘ 그 자체라고 한다. 혀의 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불이다. 이 부분의 좀 더 구체적 배경을 집회 28,10-26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필자의 관점이 지나치게 비관 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선교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우리의 필자도 자극적인 표현을 쓰면서 웅 변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7~8절에서는 혀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 지 이야기하는 구절로서 8절의 내용은 시편 140, 3 혀의 독성(6 절)을 증명해 주는 구절로 시편 140,4에서도 악한 말을 독성이라고 한다.
※ 혀가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으로 세치 짜리를 조 심 하라는 말이 있다. 그것 또한 결국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우리들은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배움 3.
☞ 혀로써 우리는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며 같은 혀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데, 나의 형제 여러분, 그래서는 안됩니다. 도대체 샘이 같은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솟아나게 할 수 있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무화과 나무가 올리브(ἐλαίας) 열매(σύκα)를 내고 포도나무(ἄμπελος)가 무화과를 낼 수 있습니까? 짠 샘물은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을 저주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과 악을 일삼는 자들, 그리고 모든 원수들을 저주하는 유대인들 의 관습만을 지적한 말이 아니다. 이 관습은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폐지시킨 것이다. 이 관습은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폐지시킨 것이다. 그 저주는 또한 이웃에게 악담을 하고 그들의 불행을 속으로 기뻐하는 인간의 태도를 일반적으로 가리킨 말이기도 한다. 우리의 임무는 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악한 이들조차 자비롭게 감싸주시는 분,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아버지를 닮을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라 그분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될 것 이다. 그러므로 이 문단에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최고의 법‘을 간접적으로 상기시키는 셈이다. 하느님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 영예롭게 해 드릴 수 없다. 같은 아버지 하 느님의 자녀들인 인간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참 되고 성스럽게 회개하는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언어능력을 그분의 영과 의지에 맞게 사용하 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언어능력을 이용하여 하느님을 충심으로 찬양함으로써 사람을 섬긴다. 그리스 도인이 이와 같이 행동할 때 그는 악한 말의 악마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의 구원능력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나의 혀는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취해햐 하는 태도)을 확실히 해야 한다. 샘과 구멍을 연결하여 입과 같이 생각해 봐야 한다. 10절의 샘에 대한 얘기와 연결하여 11, 12절에서는 자연의 지적을 통해서 비유하고 있다.
=> 선한 생각은 축복도 하고 저주도 하는 두 개의 혀를 갖고 있지 않다
∴ 내가 남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말을 먼저 해야 한다.
※ 시편 62, 4 ; 그들은 입으로는 축복하고 마음으로는 저주한다.
애가 3, 38 ; 가장 높으신 분의 입에서
집회 5, 13 ; 명예와 불명예는 수다장이에게 달려있다.
출애 20,26 ;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네 이웃을 업신여기지 마라
제 6 과 평화를 가져오는 자, 평화를 깨는 자
읽기 : 3, 13 - 4, 10
구분 : 1. 진정한 지혜의 특징 (3,13 - 18)
2. 평화와 불화 (4, 1 - 10)
배움 1. 시새움과 야망을 품는 지혜(3,14-16)와 위에서 오는 지혜(17)는 어떻게 다릅니까?
2. 다툼과 싸움은 어디에서부터 생깁니까? (4,1-3)
3.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가? (4,4 - 10)
묵상과 생활 1.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주로 어떤 것들이며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데도 청하지 않거나 잘못 청하여 받지 못하는 경 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나의 생활 중에서 얼마나 하느님과 이웃과 내 자신과의 평화 로움을 위해 노력하는가? 이런 평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 는 일들은 무엇인가?
기도지향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항상 낮출 줄 알고 하느님과 이웃안에서 항상 평화로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배움 1.
☞ 고약한 시새움과 야망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공연히 자랑하여 진리를 거슬러서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이따위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동물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새움과 야망 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그리고 평화롭고, 부드럽고 잘 순종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로 가득 차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ἐριθείαν은 `야망‘ 대신 `이기심’(로마 2,8 ;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이다. / 필립 2,3 ;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 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또는 `경쟁심‘이나 `편파심’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단어로 사용되었음. 초대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 람들이 지혜롭지 못한 경우에 파벌이 생겼다. 바울로가 세운 고린토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다.(1고린 1,10-4,21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들이 여러 파로 갈라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골몰 하기 보다는 서로 다투며 분열이 일어났었음)
행함이 없이 말로만 믿으려는 심리로 인해 생긴 질투와 야망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위하여 싸운다고 해 도 그것은 헛된 자랑이요 진리를 어둡게 만들 뿐이다.
`ψυχική‘란 말은 `영적’(πνευματικος)이란 말의 반대어로서 `심리적‘ 또는 `자연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 다. 이 표현은 유다 19절(=속물)과 1고린 2,14 ; 15,44 - 46에도 나온다. 동물적 또는 자연적 인간을 영 적세계에 대한 참된 맛을 모르고 현세와 자기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지혜를 가졌다는 일부 그리스도인 들의 자존심으로 인한 통탄할 결과는 사악한 근원, 사탄의 영에서 오는 것이다. 시새움과 자존심, 자만과 야망, 그리고 부정한 태도는 모두 하느님의 영에 반대된다. 이것들이 바로 `동물적‘이라는 표현을 가리키 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악한 행동과 행실의 근원이 기도 하다.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진리에도 반대된다. 타락한 세상의 영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무엇이 나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지혜롭다고 자처하면서도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고 경멸하여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는’것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자신 을 사탄의 종으로 나타낸다.
17절은 마태 5,3-10의 행복선언에 나오는 내용을 상기시킨다. 순결(신앙에 나아가기에 충분하고 깨끗하다 ∴ 예수님의 피로써만 가능해진다)과 평화는 마태 5,8-9에서도 같은 순서로 나온다 ; 마음이 깨끗한 사람 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 의 아들이 될 것이다. 자비(ἐλέους)는 고통받는 이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것과 내적으로 친절하고 선한 것을 행할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위로부터,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뜻을 이룰수 있다. 진정한 지혜는 신자들에게 봉사하는데서 바람직한 결실을 낸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나 혼 자 힘으로 지혜롭게 살 수 없다. 이 능력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그분을 섬기는데 이 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기 혼만의 노력으로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추구하여 지혜는 하 느님이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열매조차 맺을 수 없다. 그 지혜에는 올바른 추진력과 지침과 목적이 결여 되어 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가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 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 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Ⅰ고린 3,18-19) 야고보는 진정한 지혜를 식별하는 일곱 가지 특징을 열거하여 그 지혜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평화유지에 능동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평화 유지에 능동적으로 헌신하 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옳은 말을 하고 책임있는 형제애를 간직하며 무엇보다도 이기심 없는 실천적 사 랑으로써 헌신한다. `의의열매‘에서 `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이다.(1,20 ; 마태 3,15 ; 5,20 ; 6,1.33 ; 21, 32 참조) 의의열매는 구약성서(아모 6,12 ; 잠언 11,30 ; 13,2)와 신약성서(필립 1,11 ; 히브 12,11)에 가끔 나오는 표현으로서의 자체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그 뜻은, 남과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하느님 의 뜻을 행함으로, 그것이 좋은 씨앗이 되어 언젠가는 그를 하느님의 상급을 받을 완전한 의인으로 만든 다는 것이다. 온순하고 평화로운 사람만이 의를 행한다는 말은 1,20의 내용(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과 같다.
배움 2.
☞ 우리의 지체들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쾌락(즉, 욕정)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함. 바울 로처럼(로마 7,23) 야고보는 여기서 갈등을 느끼는 인간전체를 `지체들‘이라고 부른다. 인간 상호간의 갈 등은 각 개인의 내적 갈등에서 기인한다. 야고보에 의하면 `갈등을 일으키는’(στρατευομένων - 직역하면 전쟁, 전투)것은 쾌락(ἡδονών-욕정)이다. 본래 쾌락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유대교 전통에 서는 이 말이 쾌락에 대한 자제없는 욕구의 뜻으로 쓰여졌다. 1베드 2,11(`육적인 욕정이 영혼을 거슬러 싸운다‘) / 로마서 7,5(우리가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 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왔습니다.)과 7,25(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마 육체로는 죄 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의 갈등의 묘사를 참조하라. 야고보는 이제 군대생활과 전투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동원하여 열렬하게 설교한다. 개인이나 교회를 위한 좋은 선물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1,7)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교회 안에 `평화를 유지하려면 자신의 모든 노력이 그분 을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의 평화는 하느님께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이들 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이고 방종한 욕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밖에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나 `경건하지 못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2절의 내용처럼 아담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였다(창세 3,5) 그러한 노력은 애초부터 실 패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시새움과 미움과 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죽음으로 끝장난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2절에서 채택한 단어들. 질투와 다툼과 싸움과 살인에 함축된 내용임이 분명하다. 이 구절에서 `살인’이란 말은 엄격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살인‘이란 강한 표현을 썼다. ;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 기 형제의 생명을 마치 자기가 준 것처럼 질투하고 시기한다.(마태 5,21-22 ; 1요한 3,15)
배움 3.
☞ 인간의 쾌락에 낭비하려고 잘못 청하지 말라. 하느님께 복종하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가까이 하 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시오. 마음이 헷갈린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오. 탄식 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오. 웃음은 슬픔으로, 기쁨은 근심으로 바꾸시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 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1,5-6과 5,15-18을 참조하라. 4,3절은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욕구를 채워주시는 노리개 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기도의 조건은 옳게 청하는 것이다.(요한 14,13-14 ; 15,7-16 ; 16,23-26 : “내 이름으로” ; 1요한 5,14-15 : “하느님의 뜻을 따라” 참조) 7-10절은 아홉 개의 명령문으로 이어지는 새로 운 훈계를 담고 있다. 이 부분은 내용이 다양한 것으로 미루어, 이는 야고보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전승 자료의 훈계를 옮겨 쓴 것으로 추측한다. 아주 엄격한 말들로 경고하는데 당시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하 느님을 전파시켜야 하는 시대였으므로 신앙이 그만큼 간절했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엄격함을 요구한 것이 다. 야고보는 금욕적인 생활을 엄격히 했으며 신자들에게도 그 생활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세속에 대한 욕구를 적당히 조화시키려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지 않다. 그는 믿음과 기도와 처 신에 있어서 흔들린다. 반대로 완전한 사람은 하느님처럼 단순한 사람이다. `탄식하다‘는 `비참하다‘(ταλ- αιπωρήσατε)의 의역이다. 9절의 어조는 회심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문체다. 모든 기쁨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1,1-2 참조) 세속에 빠져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죄인들의 기쁨과 웃음을 단죄하는 것이다.(루가 6,21.25) 회심의 눈물은 겸손의 표시이며 10절의 높임을 가져오게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긍정 하는 우리의 대답에는 악마를 부정하는 대답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수 없다. 악마의 유혹과 위협에 맞서는 부단한 싸움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아무도 이 싸움 을 피할 수 없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수 없기 때문이다.(마태 6,24) 하느님이나 사탄 가운데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이기적이고 저급한 본성과 세속의 영에 대한 모든 집 착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죄있고 가련하며 무력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에 복 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도중에 구속의 기본법칙을 경험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을 잃고, 하느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그 자신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하며 그분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이것 은 선택과 연관된다.(하느님(선)과 악 중의 선택) 그리고 기도의 끝은 선택의 행해짐이어야 한다. 우리는 악의 유혹 중에서도 선을 지향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선을 가장해서 어떤 일을 했을 때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게 된다면 기도가 부족했던 것이다. 세속에 빠지면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어렵다.
※ 선택에 있어서 주의할 점
- 희망과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 선택은 언제든지 작은 기쁨을 주지만 현실적 고통을 수반한다.
- 그 슬픔과 고통이 걷힌 후에는 기쁨과 평화를 동반하게 된다.
-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전에 기도하며 하느님께 묻고 하느님께서 판단해 주시길 바라자.
제 7 과 그리스도교적 시각을 견지하라.
읽기 : 4, 11 - 4, 17
구분 : 1. 심판에 대한 경고 (4, 11 - 12)
2. 부자들에 대한 경고 (4, 13 - 17)
-> 부자들의 독자적인 삶의 계획에 대한 경고
배움 1. 야고보는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거나 심판하는 문제에 대해서 무엇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4,11-12)
2. 미래를 바라보는 2가지 태도는 무엇입니까? (4,13-17)
묵상과 생활 1. 내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동기는 무엇이며, 일상에서 내가 자주 언급해서 비판하는 일이나 사람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야고보는 생명을 연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14절)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를 갖게 되는 지 묵상해 봅시다.
기도지향 미래에 대한 계획을 주님께 겸손되이 의탁하고 또한 내 주위에 있 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배움 1.
☞ 서로 비방하지 마시오. 형제를 비방하거나 자기 형제를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심판하 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의 실천자가 아니라 심판자입니다. 입법자 와 심판자는 한 분 뿐 이시니 그분이야말로 구원할 수도 있고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심판하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 서로 사랑하고 악의를 버리고 사랑을 가지십시오.
11-12절에서 다시 혀로 짓는 죄(1, 26 ; 3,8-10 참조)를 다룬다. 이웃을 비방하고 심판하는 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곧 율법을 `심판하며‘ 무시하거나 비방한다는 것이다. 11-12절은 예수 님의 가르침(마태 7,1-2 ; 루가 6,37 ; 마태 10,28)을 연상시킨다.
야고보는 이제 이 단원의 요점, 즉 그의 독자들이 일삼았던 험담과 말다툼을 거론한다. 그것은 서로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죄요, 때로는 비방으로 발전될 수 있는 과오였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없고 독 선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공동체 정신을 파괴한다. 야고보는 분명히 그것을 염려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서로 헐뜯고 끊임없이 비판하는 작태는 여러 지역 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위험을 없애려고 거듭거듭 노력한다.(1,19-21, 26-27 ; 3,1-4 .12 ; 5,9) 이와 같이 계속되는 험 담과 트집잡기, 비판과 헐뜯음을 강경한 어휘를 동원하여 묘사한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고 그분의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 오히려 이웃을 존중하고 이기심없이 사랑하기를 요구 하는 `최고의 법‘ 즉 `자유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규정을 거슬러 새로운 입법자를 행세한다. 이처럼 자기를 높이는 위선적 태도는 `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는 모든 피조물의 기본의 무를 거스르는 것이다. 동시에 전혀 자유롭게 구원과 완성의 방식을 결정하시는 하느님의 지상의 권력과 지존하심을 주제넘게도 부정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 구원과 정좌는 오직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누가 과연 의로운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모든 사람은 자신 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 준칙은 사랑의 기본규정이다. 감히 누가 진실로 `법 을 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기준에 비출 때,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이웃사람들 에게 이기주의니 몰인정한 자기 민족이니 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던 말들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남을 성급하게 심판하거나 정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는 `내가 무엇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 인가?‘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심판하다(κρίνεις) - 인간이 행할 때는 관용(사랑)이 빠지고 독선이 들어가게 됨
배움 2.
☞ ① 세속에 몰두하면서 살지 마라.(미래에 대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룰수 있다고 장담하지 마라) → 하느님의 능력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의를 따르라.
②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런 일 저런 일 하겠다 하며 살아라.(자랑을 하지 마라) → 겸손하라.
4,13-17과 5,1-6 두 문단은 내용이 조금 달라도 분위기가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세속 일에 몰두하는 사 람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4,13과 5,1의 시작은 같다. 4,13-17의 대상은 자기 능력을 믿고 돈벌이만 생각하는 상인들이며, 5,1-6의 대상은 부자들이다. 14절의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연기입니 다”에서 `연기‘(ἀτμὶς - 원뜻은 `증기,안개’)는 고대에 흔히 무상함의 상징으로 언급되었다.(시편 37,20 ; 68,3..) 야고보는 계획있는 생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능력을 과시하며 물 질적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을 두고 예언자적 어투로(아모 8,5 ; 집회 11,10-11 참조) 경고한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기 인생의 덧없음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계획을 세워 놓고서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지위가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어리석다. 그는 모든 인간적 경험 가운데 가장 확실한 사항, 곧 미래를 좌우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미래의 일을 계획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미래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지 알 수도 없다. 내일은 알려지지 않는 시간 이다. 이 사실은 너무 자명하므로 그처럼 서두르는 계획자들은 그들의 오만뿐 아니라 어리석음과 맹목성 까지도 숨길 수 없음을 끝내 드러내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실체도 없고 흔적없이 곧 사라지는 수증 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의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 기인한다. 만사에 하느님을 계산에 넣지 않는 사람은 바보요, 금방 사라져 버리는 허무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하고 불확 실하다고 하여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 희망을, 뜻을 두고 살아야 한다 고 해서 내 자신의 삶을 대충 살며 모든 것을 팽개치고 하느님께 집중하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반 대로 하느님께 우리의 신뢰를 두고 만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섭리와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미 래에 갖고자 노력하고 소망하는 삶을 충만히 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그분의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회개해야 한다.
14절의 내용은 예수의 말씀(마태 6,25-27 ; 루가 12,16-25)과 비슷하다. 인간은 자기 목숨이 주인이 아니 다. 15절의 `주님께서 원하시면‘(Εὰν ὁ κύριος θελήσῃ)은 이른바 야고보의 조건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 방법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조건이 붙을 때이어야 하는 것 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누군지, 시간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실존뿐 아니라 계획도 이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16절에서 모든 자랑은 나쁘다고 하였다. 야고보가 허락하는 자랑 은 1, 9-10에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시오”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 이 무엇이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고린 4,7 :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
제 8 과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읽기 : 야고보서 5, 1 - 11
구분 : 1. 반사회적인 태도를 가진 부자들에 대한 경고 (5, 1 - 6)
2. 기다림 가운데의 인내심 (5, 7 - 11)
-> 인내를 가지고 재림을 기다리며 고난을 참고 견디라.
배움 1. 야고보는 5장에서도 금욕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야고보의 부에 대 한 태도는 어떠한가? (1-6절)
2. 고난받는 자를 향한 야고보의 권면은 주의 재림을 배경으로 하고 있 다. 그들에게 야고보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가?
묵상과 생활 1. `인내‘하는 인물의 예로 농부, 선지자, 욥을 들고 있다. 이 들은 각각 어떤 면에서 인내의 본이 되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우리는 종종 재물사용과 고난에 대한 대처의 문제에 부딪친 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묵상해 봅시다.
기도지향 실제적인 권면을 통해 생활 속에 더욱 인내하는 자가 되도록 도움 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 적용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배움 1.
☞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은 여러분을 거스르는 증거가 되며 불처럼 여러분의 살을 먹어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 게 주지 않은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으며,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외침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 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사치스럽고 흥청거리는 생활을 했고 도살의 날에 마음을 기름지게 했습 니다. 여러분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나눌 줄 모르며 자신들의 재물에만 욕심을 내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부자들의 무자비) 야고보는 금과 은이 녹슬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고 이야기하 고 있다. 이렇게 야고보가 예수님 보다 더 신랄하게 부자들을 고발하는 이유는 당시 교회가 부유층과 권 력층에게 억압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들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두기만 하 기 때문에 그것이 흔히 썩거나 좀먹곤 했다. 바로 이 사실이 그들의 무자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하느님께 두어야 하는 마음을 재물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이 가진 재물로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의 `가난한 자‘는 하느님밖에는 그 무엇에게도 의 지할 것이 없는 자들을 말하며 그것은 곧 하느님에게만 마음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로 우리는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받을 상이 클 것이라고 성서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가난 은 하느님을 증거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풍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 도살의 날 : 부자들이 악인들을 착취하고 학살하는 행위를 상기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 `도살 의 날‘은 부자들이 의인들을 도살하는 날이 아니라 최후 심판의 날, 곧 하느님에 의하여 악인들이 도 살되는 날일 것이다. 비참한 일을 겪게 되는 마지막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자들은 세속의 쾌락에 빠져 임박한 심판의 날을 잊고 있는 것이다.
※ 의인 :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뜻할 것 같다. 구약에서는 가난한 의 인의 고난을 여기서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시편 10,8-10 ; 37,14.32.35 ; 잠언 1,11 ; 지혜 2,20 ; 아모 5,12) 구약에서는 억눌린 자가 자주 복수심을 드러내지만 야고보가 생각하는 가난한 이는 하느 님의 심판을 믿고 대항하지 않는다.(이사 53,7 ; 마태 5,37 참조) 집회 34, 22에서는 일꾼들에 대한 착 취는 동일한 견지에서 살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배움 2.
☞ 주님이 내림하실 때까지 참고 견디시오. 농부는 땅의 귀한 열매를 기다립니다. 가을비와 봄비를 맞아 열매가 익을 때까지 그는 참고 견딥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참고 견디시오. 주님의 내림이 다가왔으니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심판을 받지 않도록 서로 불평을 터뜨리지 마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 자들을,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디는 본보기로 삼으시오.
이 인내는 종말의 시대에 요구되는 태도다. `내림‘(παρουσίας)은 본래 국왕이 어느 도시를 공식 순시함을 뜻한다. 이 말은 신약에서 흔히 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마태 24,3 ; 1데살 2,19 ; 1고린 15,23 ; 2베드 1,16 ; 1요한 2,28)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림’ 이외에도 야 고보서에는 종말과 관련된 표현이 다양하다. `마지막 시대‘ 5,3 / `구원’ 1,21 ; 2,14 ; 4,12 ; 5,20 / `생명 의 화관‘ 1,12 / `왕국’ 2,5 / `심판‘ 2,12-13 / `지옥’ 3,6 / `도살의 날‘ 5,5
우리는 세속적 충동에 이끌려 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승리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의 내림을 지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이 결실을 얻자면 모든 것의 종말과 내림 하시는 주님께 불굴의 끈기와 신중한 마음으로 전념해야 한다. 진 정한 사랑은 불평하기를 삼가거나 남 흉보기를 거절할 때 제 모습이 드러난다. 실로 그런 사랑은 전혀 이기심이 없으며, 남들에게 짐이 되고 도저히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편들어 준다. 자기 의 사랑을 받을 가치고 있고 자기의 감정을 전혀 상하지 않게 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놀라운 일을 한 것이 없는 것이다.(마태 5,46-48) 사랑이 없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며 그들에 대 하여 불평하고 그들과 같은 교회에서 살고 있다고 불만을 늘어 놓는다면 그것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을비와 봄비는 직역하면 `이른 것과 늦은 것‘이다. 그리스어 문법상으로는 이것이 이른 열매와 늦은 열매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팔레스티나의 농사와 구약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관용어를 (신명 11,14 ; 호세 6,3) 생각하면 본문의 번역이 옳을 것이다. 지중해연안 지방에는 4월부터 9월까지 비 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에 오기 시작하는 비는 `이른 비’이며 봄에 마지막으로 오는 비는 `늦은 비 ‘이다. 이 비유의 내용은 마르 4,26-29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푸대접하는 믿지 않는 세대에게 하느님을 알리며 이미 유대교에서 인내의 본보기 및 순교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제 9 과 다른 이들을 온전케 하려면
읽기 : 5, 12 - 20
구분 : 1. 무조건 정직하라는 권면 (5,12)
2. 삶의 여러 상황을 위한 지침 (5,13 - 15)
3. 죄의 고백과 중보의 기도 (5,16 - 18)
4. 그릇된 길을 가는 형제에 대한 영적인 도움 (5,19 - 20)
배움 1. 5,12에서는 `혀‘의 위험에 대해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 게 어떠한 실천을 요구합니까?
2.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기도하라고 5, 13 - 18에서 말해줍니다.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기도를 드리라고 이야기 합니까? 그리고 병 자성사와 고백성사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14-16절에서 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묵상과 생활 1. 야고보서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5,23-26에서는 우리가 제단에 예 물을 드리려할 때 먼저 이웃과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껏 기도하기 전에 그리고 미사 드리기 전에 누군가 를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않은채 하느님께 나아가려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고 또한 나의 잘못을 용기 있게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우리 주변에는 하느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많습니 다. 나는 그런 이웃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혹시 나의 신앙 성숙만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3. 교회에서 멀어지는 청년들을 적극적인 관심을 통해 하느님께 로 마음을 돌리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묵 상해 봅시다.
기도지향 우리 주위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볼 때 그 냥 지나치지 않도록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시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찬미하고 주님의 진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 도 합시다.
배움 1.
☞ 무엇보다 맹세하지 마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에 어떤 것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시오. 이렇게 해야 여러분은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마태 5,33-37에도 나오는 부분으로 마태오와 야고보의 훈계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동일한 단절 어를 각기 자기 나름대로 채집, 수록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말씀은 법정에서 하는 맹세에 관한 훈계가 아니라 당시 일상생활에서 성행하던 맹세에 관한 훈계이다.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의 진실성조차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 증언하는 폐습이 널리 유행하였다. 겉보기 에는 그들이 십계명의 제 2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를 피했으나 그 대신 ` 하늘’, `땅‘, 또는 `성전’과 같이 완곡한 표현을 썼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모든 표현은 하느님을 가리키 므로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하느님을 끌어들인 셈이다. 더욱이 율법학자들은 이 완곡한 표현들을 그 구 속력의 정도에 따라 아주 세밀하게 구별해 두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진실을 전도시키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욕되게 하는 행위를 공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아예 맹세를 금하셨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맹세하지 말아야 했다. 하늘에 계신 한 분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들의 말은 직접적이고 숨김없고 진실해야 했다. 그들의 `예‘는 言外의 다른 뜻이 없이 단순한 `예’여야 하고 그들의 `아니오‘도 단순한 `아니오’이어야 한다. 당시 `맹세하다‘라는 단어는 법적용어로서 목숨을 거는 행위를 지칭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맹세금지의 새로운 법규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진실을 말함으로써 맹세가 필요 없는 생활분위기를 조성하라는 것이다.
`단죄받다’는 `심판에 빠지다‘의 의역이며 `단죄받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된다. 단죄받는 이유는 진리가 아 닌 우상이나 상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상식이란 흔들리는 것들이다. 마치 진리인 것 같지만 진리가 아 닐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다 통용되는 것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틀린 일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진리는 상식일 수 있지만 상식은 진리일 수도 있고 진리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단죄)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진리에 순종하여 그릇된 것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배움 2.
☞ 기쁘거나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께 찬미 드리고 기도하라. 앓는 이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주님 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병자를 구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이며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이다. 의인의 힘찬 기도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
13-15절의 세 가지 경우 가운데 13절의 두 가지(고통과 기쁨)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며, 14-15절의 병환 은 13절에서 말하는 고통의 한가지이다. 신자는 이런저런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며 영육 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그분과 나누어야 한다. 이것은 시편의 영성과 동일한 신앙태도이다. 과연 13절의 `찬 미의 노래를 부르시오‘는 `시편을 부르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도유는 의학 적인 의미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르 6,13에 의하면 예수가 파견한 열두 사도는 `병자들 에게 기름(ἐλαίῳ 올리브유)을 발라 고쳐주었다‘고 한다. 포도주로 소독을 하고 그곳에 기름을 발라 상 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것은 곧 성사화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여 기 기름은 기도의 입체적 표시다. 14절의 `주님’은 예수일 것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長老)들‘을 부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 바울로가 세운 교회들과 달리 야고보의 교회에 는 장로라는 직책이 있었다는 것과 둘째 장로들이 치유의 은사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1디모 4,14에 의하면 교직자는 장로들의 안수로 은사를 받게 된다.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는 병자성사의 근거를 이 구절에 두었다. `교회 장로들’이라는 복수형 때문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 병자성사 집행 시에 일곱명의 사제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야고보는 이런 예식보다 병자를 위한 자유로운 `기도회‘를 생각했 을 것이다.
※ πρεσβυτέρους : 장로, 원로, 주교를 일컫는 단어로 장로는 그 공동체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이 중에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규정에 맞는 자이어야 했다. 예) 술주정뱅이어서는 안됨, 훌륭한 가장이어야 함, 우상숭배자는 안됨 등등
`믿음의 기도‘는 은사에 의한 특별한 효력을 가진 기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이 런 기도는 복음서(마르 11,22-23 ; 마태 17,20 ; 21, 21 ; 루가 17,6)와 바울로의 서간(1고린 12,9 ; 13,2) 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병자 자신의 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이 되는 경우에 관하여는 마르 5,34 ; 10, 52 ; 루가 17, 19을 참조하고 다른이의 믿음이 치유효과를 가져온 경우에 관하여는 마르 2,5 ; 9,23을 참조하라. `구한다‘는 것과 `일으켜 주신다’는 것은 종말의 구원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 으나, 문맥상으로는 오히려 육체적 치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마르 5,34.41 ; 루가 17,19 참조) 야고보는 병이 낫지 않는 경우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교회 안에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것 같다. 그리 고 야고보는 임종의 위중한 경우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경우에 병은 죄 때문에 생길 수도 있 다. 그런 경우에는 육체의 치유와 함께 마음도 치유되고, 육체의 치유는 그 마음의 치유에 대한 표시다. `의인의 기도‘는 구약시대 성인들의 기도를 연상시킨다. 그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창세 18,23-33), 모세(출 애 32,11-14, 30-34), 예레미야(에레 18,22 등)는 특히 백성을 위한 전구자로 이름이 났다. 그러나 17-18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예를 보면 16절은 전구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기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야고보에 의하면 죄의 고백으로 깨끗해진 신도의 기도는 구약의 의인들의 기도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1열와 17-18장에 의하면 엘리야는 예언만 했을 뿐, 기도하지는 않았다. 또한 가뭄이 3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1열왕 18,1) 그러나 야고5,17과 루가 4,25에서는 가뭄기간을 3년반이라 한다. 야고 보와 루가는 다른 전승을 사용한 것 같다.
고통을 견디는 힘은 본디 하느님과 믿음의 일치를 이룬 가운데 드리는 기도에서 솟아난다. 그리스도인 은 이 같은 일치를 이룬 덕분에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다. 우 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할 외로운 처지에 있지 않다. 시련을 당했을 때 할 말 을 잊게 되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사 랑을 부어주신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그들에게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 도록 도와주신다. 한편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께 은총과 힘을 청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일하고 진정한 신앙은 기도에 토대를 둔 믿음이다. 지적확신만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극복하 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곤궁할 때 도움을 구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신앙 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기도가운데 신앙은 살아서 행동한다. 또한 야고보는 앓는 사람을 위하여 교회가 드리는 특별히 유효한 기도형태 곧 병자성사를 알아본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의 병을 다. 그리고 사제들을 통하여 앓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신다. 이 성사는 인간 자신이 소 신껏 강구하는 치유수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그 수단을 주시고 그로 인한 치유가능성을 주신 것은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그 수단을 이용하기를 그분은 바라신다. 그렇지만 병의 진정한 의미 와 병의 숨겨진 뿌리인 죄의 치유 가능성을 알아보자면 역시 그리스도께 문의해야 한다. 다른 성사의 경우처럼 병자성사에서도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해야 한다. 병자성사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재현한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으며 가장 최 우선시 되는 것은 믿음의 기도이다. `이제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며 이 기도는 그동안의 악마와 죄에서부터 떠날 수 있도록 하는 기도이다. 가장 먼저 치유되어야 할 것들은 하느님께 갖고 있던 불신을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성사는 마술적으로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한갓 효과적인 기계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앓는 이는 가끔 그 자신이 죄를 저지른 결과 괴로움을 겪을 수도 있는 만큼 하느님께서는 환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신다. 이 성사는 죽을 위험이 있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이 성사적 구원은총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하느님을 신뢰 해야 한다. 위중한 병으로 앓을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과 생명을 주시는 이 친교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 있다면 병은 우리를 정화시키는 의미를 지니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라면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 결과 육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직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은총이다. 이 은총은 그리스도 의 사제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모든 병은 교회의 진보를 촉진한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 서 신앙의 정신으로 병을 견디어 낸다면 병은 우리를 부유하게 한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그들의 병 과 죄들까지도 신앙의 정신으로 교회에 갖고 가서 주님으로 하여금 은총을 내려주시게 할 때 부유해진 다. 또한 전례가 시작될 무렵에 하는 죄의 고백은 형제적 사랑을 거스른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준다. 진정한 기도는 오직 깨끗해진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하러 가기 전에 우리 형 제들과 서로 화해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줄 것을 예수께서 명시적으로 요구하신다.(마태 5,23-26 ; 18,23-35참조) 초대교회가 죄의 용서를 위하여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전례를 시작한 것 도 그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미사성제를 시작할 때 드리는 고백의 기도는 고대의 그 예식을 본받은 것이다. 그 기도를 드리면서 함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 이 공동고백은 소리를 내서 죄를 말하며 공동으로 고백하던 것이 지금은 미사성제 때 기도문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양 해야 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 진리로부터 떠나서 잘못을 저지르는 이웃을 되돌아오게 하며 진리에 머물 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야고보의 가르침이다. “교회 안의 잘못을 서로서로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주어 되돌아오게 하라” 기도하라 - 찬미하라 - 진리에 머물도록 기도하라..
보론 1. 야고보서에 나타난 “가난한 자의 경건”에 대하여“
1. 해당 본문들과 이들의 중요한 진술
1장 9-11절 : 1) 9-10절의 대구법에서 ταπεινός(낮은)와 πλούσιος(부유한)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 용된 것과 같이 야고보서는 “가난한”이라는 말과 “겸손한, 낮은”(ταπεινός)이라는 말을 동일어로 삼고 있다.
2) 야고보서는 `낮추어짐 - 높여짐‘이라는 도식을 쓰고 있다(거꾸로 높여짐 - 낮추어짐이라는 도식도 사용함)
3) 야고보서는 `낮추어짐-높여짐‘이라는 도식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1장 27절 : 어려움 가운데 있는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라는 요청 (또한 2장 15-16절의 예도 참조하라)
2장 5-7절 : 1)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를 구원의 재산을 위해 택하시리라는 것
2) 가난한 자들이 눌리움을 받고 법이 가난한 자들에게 불리하도록 부자들에 의해 왜곡됨
3) 가난한 자들 위에 불리워진 “이름”이 부자들에 의해 모욕됨
5장 1-6절 : 가난한 자들을 억누르는 부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위협적으로 예고함(6절에는 가난한 자와 “의 인”(義人)이 동일시 되고 있다).
5장 7-11절 : “형제들”에게 내림과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참고 견디라고 권면함.
“가난한 자들의 경건”이라는 도식을 살펴보면 마지막 두 단락(5,1-6과 5,7-11)이 그 소재로 모아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구약과 후기 유다교에 나타난 “가난한 자의 경건”
레위기 25장 23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 (“땅은 다 내 것이요 너희는 나그네이며 거류민이다”)에 따르면,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동일하게 야훼의 “상속재산”을 쓰며 거기에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안식년에는 소유가 없는 자들도 토지에서 나온 수확을 같이 나눌 권리를 가진다.(출애 23,10-11 ; 레위 25,2-7) 그 외에는 가난한 자들이 전답이나 올리브밭, 포도원 등에서 이삭을 줍거나 떨어진 열매를 주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레위 19-9-10 ; 신명 24,19-22) 50년째 되는 해에는 모두가 각각 자신의 옛 소유재산으로 돌아가야 하며 채무로 인한 종살이로부터 풀려난다(레위 25,8-17). 하느님은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시며(출애 22,21-23) 가난한 자들의 송사에서 공의가 지배할 것을 요청하신다(출애 23,3.6). 가난한 자에게는 이자를 요구해서는 안된다(출애 22,24).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사회규범을 예견하고 있다. 15장 4절에 따르면 야훼의 땅에는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15장 11절에는 그럼에도 궁핍한 자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에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를 위해 네 손을 넓게 펴야 한다.” 오경에는 따라서 “가난”이 완전히 경제적-사회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이며 가난한 자는 동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왕조시대에는 국민의 사회규범이 점점 더 경시되었고 따라서 부는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는 자들의 손으로 모여 들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오만하며 폭력을 일삼는 부자들에게 반대하면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해야 했다. 그들은 부자들의 끝 모르는 욕심을 비난한 것이다. “땅을 갖고 싶으면 땅을 빼앗으며 집을 갖고 싶으면 집을 탈취하는도다. 그들은 사람과 그의 집과 주인과 그의 소유에 폭력을 가하는구나”(미가 2,2 ; 참조 3,1-3). “그렇다. 악인들이 내 백성 가운데 있구나. 그들은 새를 잡는 사냥꾼처럼 엎드려 숨어 엿듣고 있다가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바구니에 새들이 가득한 것 같이 그들의 집은 속임수로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권세있고 부유하며 살찌고 윤택하다... 그들은 고아들의 권리를 위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들의 일을 공정하게 판견하지 않는도다”(예레 5,26-28). “집에 집을 연하며 땅에 땅을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 홀로 소유주가 되려 하는 너희에게 화 있을진저~”(이사 5,8)). “작은 자들을 법정에서 내쫓고 내 백성 중 가난한 자들로부터 권리를 빼앗기 위해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고...과부를 착취하고 고아들로부터 약탈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이사 10,1-2) “그들은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으며 성문에서 가난한 자들을 내쫓는도다”(아모 5,12)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도 “가난함”은 전반적으로 사회적 개념으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이 개념이 종교적 색채를 얻게 된다. 여기에서는 폭력에 의해 억눌리는 자들(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과 동일시되고 있다(시편 37,45;146,8-9;147,6). 시편의 탄식의 노래들에서 “가난한 자”는 박해받고 권리없는 자 즉, “폭력을 일삼는 적대자들을 피해...야훼께 피난처를 구하며 판결에 져서 잃어버린 권리를 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이다(참조. 시편9,19;10,2.8.9.10.14;18,28;35,10;74,19). “왜냐하면 (하느님은) 피흘림을 벌하시는 분으로 저희를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 하시는도다. 야훼는 내게 긍휼을 베푸셨으며 나의 비참함을 보셨도다. 그가 나를 일으키셨으며 사망의 문으로부터 나를 높이신다...가난한 자가 영원히 잊히지 않으며 비참에 처한 자의 희망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로다”(시편 9,13.14.19). “악한 자들이 거만하여 가난한 자를 박해한다...악인이 가난한 자를 잡으려고 엎드려 기다리는도다...야훼여, 일어나소서. 손을 들으사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야훼여, 당신은 가난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나이다. 저희 마음을 견고케 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의 권리를 옹호하셔서 이 땅에서 다시는 아무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하소서”(시편 10,2a.9b.12.17.18). 가난한 자들의 이 탄식의 노래는 분명히 낮추어짐-높여짐이라는 도식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부유하고 권세높은 “원수들”에 의해 쫓기고 핍박받는 가난한 자가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고 “높여지는”데 반해 이 악인들은 그에 의해 낮추어진다. 시편 37.49.73편에도 이 도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편 37편에서는 부유한 악인에 의해 억눌리는 자의 구원이 세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반면 시편 49편(16절:“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시리로다. 그렇다. 그는 나를 높이시리라”)과 73편의 가난한 자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로의 구원을 믿는다(73,26:“내 육체와 마음은 사라질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히 나의 분깃이시니라”).
이전에 몇몇 학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라는 개념이 바빌론 유배시기 이후의 시기에 유다교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당파”를 뜻했었다는 견해를 주장하였는데 이 의견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쿠쉬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가난한 자와 악인이라는 두 개념 속에는 ...두 `종류‘ 혹은 두 `전형’의 인간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물질적인 소유에 있어서나 사회적, 종교적 성향에 있어서나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인간의 전형들이다.
“가난한 자”는 “경건한 자”와 단순히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스바니야서 3장 12절(“내가 비천하고 가난한 백성만을 너희 중에 남겨두리니 이스라엘의 이 남은 자들은 야훼의 이름에 의지하리라”)에는 “교만한 자들”(참조 11절)에 대한 하느님의 위협이 얘기되고 있다. 오직 가난한 이들만이 다가올 심판을 견디어 낼 것이며 이스라엘의 새로운 구원 공동체의 출발점을 이룰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대하여 그 행동에 있어 옳은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13절). 가난한 이는 “악인”과 달리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서 있으며 구원을 오직 그로부터만 바라고 그가 도움을 주실 것을 늘 굳게 믿는 “겸비한 영”의 소유자이므로 경건한 자의 이상적인 전형을 어느 정도는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야말로 믿음의 진정한 자세의 전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 특히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문헌들이 특수한 “가난한 자의 경건성”과 같은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발전된 이 경건성은 후기 유다교 시대에 특히 쿰란에서 활발하였다. 이는 의심할 나위없이 이 쿰란 공동체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의 창립자인 “정의의 교사”가 “악인의 사제”와 이 사제의 신봉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창립자에 의해 씌어졌을 가능성이 큰 시편(Hodajoth)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낮추어짐-높여짐이라는 도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하게 관철되고 있다. 예를 들어 1QHⅡ, 31-35("주여, 제가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의 눈이 저의 생을 [지키고] 당신께서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의 질투로부터 저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니다. 감언이설을 찾는 무리로부터 당신은 가난한 자의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죽이려 하고 그의 피를 흘리려 하니 이는 나의 걸음이 당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허위를 일삼는 자들로 하여금 저를 경멸하게 하고 저를 수치스럽게 하나이다. 그러나 하느님, 당신께서는 곤고하고 작은 자의 영혼을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나이다“) ; Ⅳ,17-18(”강한 악인들이 나를 대적하여 억누르려고 서두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종일 저의 영혼을 누르옵니다. 그러나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시는 이시며 가난한 자의 생을 건지셨나이다...“) ; Ⅴ,20-22(”주여, 당신은 찬양받으실지어다! 당신께서는 고아를 버리지 않으시고 작은 자를 경멸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권세는 [다함이 없고] 당신의 영화는 끝이 없으며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당신을 섬기옵니다. [당신은] 困苦한 자들의 발걸음이 가라앉을 때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이는 당신께서 `은혜를 입은 가난한 자들‘ 모두를 혼란으로부터 높이 올리시기 위함이옵니다“). ”가난한 자“가 곧 ”겸비한 자“(자신의 죄를 알고 구원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희망하는 자)라는 사실이 이 쿰란 시편에는 철두철미 일관되어 있다.
쿰란 종단의 규율(1QS)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Ⅹ,19에서 기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저는 죄로 가득찬 재산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재산 그 자체가 나쁜 것으로서 거부되지는 않고(Ⅸ,8 참조. 여기에서는 “성스러운 이들의 재산”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 재산이 단지 “사기를 일삼는 이들의 재산과 섞이면 안된다”는 것이다(상동). 다마스커스 문서에는 재산에 대한 날카로운 말들이 들어 있다(가령 Ⅸ,17 ; Ⅷ,7 ; ⅩⅠⅩ,19 참조). 1QM에 따르면 종말에 있을 성스러운 전쟁시에 벨리알의 무리들이 “당신의 구원을 받은 가난한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Ⅺ,8-9).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나라의 [원]수들을 가난한 자들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며 티끌 속에서 무릎을 끓는 자들의 손에 맡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Ⅺ,13). 여기에 다시 “가난한 자들”과 하느님 앞에서 “겸비한 자들”이 동일시되고 있다(Ⅺ,10;ⅩⅣ,7도 참조). 시편 37편에 대한 주석(4QpPs 37) Ⅲ,10-11에 따르면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멸절되어 영영 없어질 것이다.” 하바꾹서 주석(1QpHab) Ⅴ,4에 보면 이 가난한 자들은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Ⅸ,12 ; 참조. Ⅹ,13). 이상과 같은 쿰란의 본문들에는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이 “어떤 상태가 아니고 하나의 삶의 태도이다”(Maier, Ⅱ,87). "가난“이 일반적으로 하나의 종교적인 개념이 된 것이다.
3. 야고보서와의 비교
구약성서와 후기 유다교에 나타난 가난한 자의 경건성의 여러 가지 요소들 중 야고보서에 나타나지 않은 요소는 하나도 없다. 두 곳 모두에 “가난한”이라는 단어가 곧 “겸손한” 그리고 “외로운”이라는 표현들과 동일시되었다. 양쪽 모두에 하느님을 모르는 부자들에 대한 위협이 들어 있다. 그리고 구약-후기 유다교에나 야고보서에나 종말론적으로 규정된 도식인 (권세있고 하느님을 멀리하는 부자들에 의해 가난한 자가) `낮추어짐‘-(하느님과 그가 내릴 부자에 대한 파멸케 하는 심판에 의해 가난한 자가) `높여짐’이 나타난다. 가난한 자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다! 쿰란의 문헌에도 이 도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주장과 쿰란문서들 특히 “전쟁에 관한 두루마리”에 드러난 주장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즉, 야고보는 억눌리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모든 도움을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기대할 뿐(5,2이하 ; 5,7이하) 종말에 하느님을 모르는 부자들인 벨리알의 아들들을 대적하여 가난한 자들이 일으킬 성스러운 전쟁으로부터는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야고보의 이러한 견해는 구약의 “가난한 자들의 시편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야고보서에 나타난 가난한 자들이 일반적으로-언제나 그렇지는 않다!-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아 실제로 가난한 자들로서 그리고 부자들이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들로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2,2이하와 4,3-5,6의 예를 보라) 사회적인 동기도 함께 역할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난한 자의 경건성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종교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야고보서에 드러난 가난한 자의 경건성에서 “그리스도교적인”것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 대망에 있다. 즉, 도움은 내림하실 주로부터 온다(5,7 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인내와 확신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이 서한이 씌어지던 시기의 구체적인 경험이 야고보서의 가난한 자의 경건에 대한 가르침의 배후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여기에서 제기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교회의 가난한 신도들이 권세높고 불경건한 부자들로부터 실제로 핍박을 받았는가?‘라는 물음 역시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에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어쨌든,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할 때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야고보는 자신이 받아들인 “가난한 자의 경건”이란 주제의 도식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는 토론에 사용되는 수사학적 방법들도 이용함으로써 그가 받아들인 도식들의 효과를 높이고 있는데, 따라서 독자들에게 이 문제가 매우 “시급하다”는 인상을 던져주고 있다. 이는 그가 교회 내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여기에서 비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그가 중요시 여기는 하나의 “이상”(理想)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데 있다. 이 이상에 따르면 “가난하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일치한다”(디벨리우스). 야고보는 교회들이 부유한 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이 이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부자들을 향한 그의 비난은 분명 그들에 대한 경고로서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의 경건이 제시하는 이상을 열심히 따르라는 권면인 것이다(5장 1절에서 부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고있음을 참조하라!).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그의 나라의 상속인으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는 이미 아주 초기부터 부유한 신도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서한 내에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다고 해서 이 서한이 후기에 기록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이상”은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이상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자세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가 특별히 관심갖는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야고보로 하여금 “가난과 부”의 문제를 전해 내려오는 도식에 따라, 그러나 자신의 전 실존을 다 내던질 정도로 열렬히 다루도록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목적 관심이다. 부는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그들의 재산으로 도대체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야고보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고 있다 :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도우라! 이렇게 해서 부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구할”수 있다. 따라서 인의(認義)에 대한 담론인 2장 14-26절도 어떻게 보면 “가난한 자의 경건”이라는 이상을 명백히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의롭게 해 주는 “행위”는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소용없는”것이 되고 만다.
야고보가 가난한 자의 경건이라는 주제를 전승된 도식들을 빌어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즉, 2장 6절의 물음(“여러분을 학대한 자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간 자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배후에 그리스도교회들이 직접 겪은 어떤 구체적인 경험이 들어 있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전승된 “도식”들을 이 질문의 대답으로서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가난과 부”라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그에게 전승되었던 “도식들”을 사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토록 격렬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난한 신도들을 억누르는 “부자들”에 대해 진술할 때 유다인들을 의미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문제의 역사적 배경의 윤곽이 곧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증거에 따르면(사도행전, 바울로의 서신들) 유다인들은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의 특별한 적대자들이었다. 스테파노의 역사(특히 사도 7,52)와 큰 야고보의 처형, 사도 바울로의 체험 등을 참조하라. 또한 가령 데살로니카 전서 2장 14-16절에 있는 매우 초기의 증언에 보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다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를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다 사람들에게서 고난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같은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주 예수와 예언자들을 죽이고 우리들을 쫓아내고...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마침내 그들에게 내린 것입니다. 큰 만찬의 비유(루가 14,15-24)의 전후문맥은 ”각 항에 언급된 부자들이 예수의 적대자들인 유다인들이라는 것“(하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때 ”부자라는 집합 개념 즉 예언자적 비판을 규정한 개념을..루가가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밤멜(Bammel)은 ”가난과 부“라는 주제가 루가복음 14장-19장에 수록된 오래된 전승의 복합체에서 ”하나의 지배적인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고 추측한다. ”유다교의 대표자들인 부자들 위에 화가 닥치리라는 경고가 내려짐으로써 이 서술의 배경에 서 있던 신자들의 범주, 즉 자신들을 가난하고 상실당한 작은 자들 그리고 과부와 죄인 등과 동일시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유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만일 이 의견이 옳다면 그리고 이를 야고보서에도 적용한다면, 부자들에 대한 비난과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가진 ”체험“들은 단번에 하나의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 ”가난한 자들“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남은 자들이다(참조. 즈가 3,12). 즉 ”부자들“(실제로 유다인을 뜻했음)로부터 압제받고 법정에 끌려가는 그리스도교회인 것이다. ”부자들“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인들 위에 불리워지는 성스러운 이름을 모독하기까지 하였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 ”가난한 자들의 경건“이라는 이미 주어진 형태로 표현된 것은 처음이 아니리라. 쿰란의 주석과 시편들에도 동일한 것이 일어났었고 이미 구약성서에서도 그러했다. ”가난한 자의 경건“에 대한 야고보서의 여러 진술 가운데 몇몇 부분들은 물론 이 배경(유다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회가 받은 박해)으로부터 설명되지 않는다. 가령 2장 2절 이하의 ”경우“가 그렇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금가락지를 끼고 호사스럽게 차려입은 부자가 한 유다인을 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위에서 이미 언급된 서한의 의도가 다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즉, 가난한 자의 경건에 나타나는 理想을 새로이 인식시키고, 부가 너무나도 쉽게 끌어들이는 썩어 없어질 삶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독자들을 만류하고 그 길을 멀리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우리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가난한 자의 경건에 대한 전승된 ”도식“은 구체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경험을 이 도식에 비추어 해석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신실한 삶의 종교적 이상을 서한의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명확하게 제시하도록 한다. 이 도식은 쿰란문헌에서도 역시 이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하였다.
4. 예수의 설교와의 비교
한 가난한 집안 출신인 예수(루가 1,52-53;2,7.24)는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였는데(루가 6,20), 이때 물론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바로 그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마태11,5=루가7,22;참조 4,18). 예수는 소유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그런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눈에 띈다 : 마태 20,15;24,45이하 ; 밀밭에 난 잡초에 관한 비유, 포도원 주인에 관한 비유, 맡겨진 돈에 관한 비유를 참조하라). 그러나 그는 부자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소리쳤고(루가 6,24),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마르 10,23 및 병행구). 재물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마태 6,24 및 병행구). 재물은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도 쉽게 질식시키며(마르 4,19) 종말론적 실존을 위태롭게 한다(참조. 마태 6,19-20 및 병행구 ; 마르 8,38 및 병행구 ; 루가 12,15.21 ; 어리석은 부자 농부의 비유). 예수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귀중한 진주이며 밭에 감추어진 보화로서 이 지상의 소유를 무가치하게 만든다(마태 13,44 이하). 재물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찾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이다(마태 6,33 및 병행구). 특히 예수가 자신을 따르라 부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루가 14,33 ; 마태 10,9-10 ; 마르 1,18.20 및 병행구 ; 10,21 및 병행구 ; 10,28 이하 및 병행구). 그리고 예수는 고통당하는 이웃을 도우라고 요청한다(루가 16,9 :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10,25-37 : 자비로운 사마리인의 비유 ; 16,19-21 : 한 부자와 가난한 나자로의 비유 : 여기에서는 낮추어짐 - 높여짐이라는 옛 도식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누구든지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저는 자들, 그리고 소경들을 불러야 한다(루가 14,13).
야고보서의 “가난한 자의 경건”은 이상에서 간략히 개괄해 본 예수의 설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야고보에게나 예수에게나 가난한 이들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들이다. 양자 모두 “화가 있으리라”는 경고를 통해 부자들을 질책하고 있으며, 양자 모두 부자들의 물욕을 경계하라고 이르고 있다. 양자는 또한 가난한 이의 낮추어짐-높여짐의 도식 안에서 사고하며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웃”이라는 것이 “아무런 제한도 없는” 개념임을 주장하고 있다. 단지 가난한 이의 경건에 관한 전승된 도식을 예수보다 야고보가 더욱 일관성 있게 관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특히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에 의해 억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다.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을 비유의 형식을 빌어 제시하고 있는 데 비해 야고보는 매우 분명한 범례들을 가정된 “사건들”의 형태로 제시하며 또한 수사학적 담론양식을 통해 이 예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와 야고보의 비교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오직 표현양식에 있어서만 서로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자들에 대해서 야고보가 예수보다 더 큰 혐오감을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원 교회들의 상황과 그들이 겪었던 일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그들은 구약성서로부터 전승된 가난한 자의 경건에 관한 도식과 이 도식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자신들이 겪은 박해에 비추어 해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쿰란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루가의 전승자료에도 이런 체험들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보론 2. 야고보서에 나타난 하느님像
1. 통계자료
하느님(아버지)은 열 여섯 번(ό) ϑεός로 표현되어 있다 - 그리스도는 한 번도 ϑεός로 표현되지 않았다. ; 하느님은 여덟 번 κύριος(주)라고 불리웠다 - 그리스도는 여섯 번 κύριος로서 지칭되고 있다(1,1 ; 2,1 ; 5,7.8.14.15) ; 그리고 세 번은 하느님이 πατἠρ(아버지)라고 칭해진다(그 중 한 번은 πατήρ τών ϕώτων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로서 : 1,17). 여기에다 νομοϑέτης(율법을 제정하신 분)와 κριτής(심판하시는 분)가 4장 12절에서 하느님의 호칭으로 쓰이고 있다. ϑεός와 κύριος라는 칭호들은 구약성서를 인용한 데서 몇 번 나오며(2,23 ; 3,9 ; 4,5 ; 5,5.11b) δικαιοσύνη ϑεού("하느님의 의“ : 1,20), ένώπιον κυρίου(”주 앞에서“ : 4,10), έν τῷ ὀνόματι κυρίου(”주의 이름으로“ : 5,10 ; 5,14 -> 그리스도도 참조하라) 등과 같은 전승된, 형식적인 용법들에도 나온다. ϑεός라는 호칭이 4장 8절까지만 나오고 그 후에는 κύριος라는 호칭만 쓰인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임에 틀림없다.
2. 하느님의 본성
야고보에게 있어서 유일신론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마귀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할 정도이다(참조 2,19). 하느님은 만유의 창조자(“아버지”)이시고(1,17) 또 그런 점에서 하느님과 세상의 원초적 대립이란 야고보에게는 생각될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자신의 영(pneuma)을 인간 안에 거하게 하신다(참조 4,4 ; 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세상과의 원수됨”(참조 4,4 ; 1,27)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세상을 사랑함”은 4장 1-4절에 분명히 드러나 있듯이 세상을 향해 무절제하게 마음을 기울이고 비도덕적으로 세상일과 세상적인 욕정에 빠져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영지주의적인 세계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느님의 본성은 어떤 악마적인 것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의 본성과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 온전하시며 “분명한” 분이시다 : 그는 따지지 않고 기꺼이(ἁπλώς : 1,5) 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아무도 악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 자체가 하느님에게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ἀπείρατος : 1,13). 그 분은 변덕스럽지 않으며 이방의 신들처럼 “날씨 변하듯” 변하는 분도 아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는 오직 좋은 선물만이 온다(1,17).
하느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주권으로 새로운 종말론적 창조를 가능케 하되 이를 자신의 권세있는 말씀을 통하여 하신다(1,18). 그분은 주(主)이시므로 믿는 자는 그분께 기쁨으로 “복종해야”하며 그분께 “가까이 가야”한다(4,8). 그리고 삶의 계획들 가운데 그분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4,13 - 14). 겸손한 자들에게 하느님은 은혜를 주시되 그것도 창조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신다(4,6). 하느님은 그 자신에게 속한 자들에게 “가까운 하느님”으로서(4,8) 신뢰로 가득 찬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며(1,5 ; 5,15-17) 자비롭고 관대한 분이고(5,11) 죄를 용서해 주신다(5,15).
하느님은 사회정의를 사랑하고(참조 1,27)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미워하며 이를 벌한다(5,4-6). 그러므로 그는 가난한 자들도 자신의 나라의 상속인으로 택하셨으며(2,5) 자신의 공동체 내에서 가난한 자들이 대우받고 돌봄을 받기를 요구한다(2,3-5. 5-16).
이 지상에서의 삶과 다가오는 삶의 미래는 그의 손에 달려 있다(4,12). 그는 율법을 제정하신 분으로서 심판하시기도 하는 분이다(4,12). 그의 준엄한 심판은 무엇보다도 반(反) 사회적인 자세를 가지고 양심도 없이 삶의 쾌락에 빠져 있는 부자들을 향해 내려지며 거기에다 사랑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저 거짓 믿음에 내려진다. 그리고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도 그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삶의 시험과 시련 가운데서 견디어 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은 언젠가 생명의 면류관을 선물하실 것이다(1,12).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은 야고보서에서 특히 주(主), 아버지, 심판자이시고 따라서 자신의 역사의 “저쪽에” 서 계시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다. 이러한 하느님像은 바로 예언자들과 예수의 하느님像에 일치한다. 이렇게 하여 서한의 명백한 신학적 윤곽이 하느님像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론 3. 야고보서의 신앙개념에 대하여
“우리는 야고보로부터 믿음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얻어낼 수 없다. 독자들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W. 비이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의 “신앙의 개념”을 더 상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과 용어들이 야고보서에서 πίστις(믿음)라는 말과 연결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1. 1장 3절에는 “여러분의 믿음의 연단”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연단”은 전후문맥이 분명하게 보여 주듯이 여러 시험들(πειρασμοί) 가운데 높여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의견에 따르면 믿음은 종말론적인 실존이 간단히 “보장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히려 시련을 대담하게 견뎌내는 데서 진정한 믿음으로서 확증되어야 한다. 1장 1-12절의 전 단락은 πίστίς가 다름 아닌, 시련 가운데서 쉽사리 상실될 수도 있는 종말론적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앙의 실존은 生의 여러 시험 가운데서 끝까지 지켜져야 하며 따라서 `인내‘(ὑπομονή)는 이러한 실존의 본질을 특징짓는 표시가 된다. 특히 후기 유다교의 관념에 따르면 이 인내라는 표시는 신앙의 실존을 종말론적인 실존으로 성격 짓는다. 신앙의 실존의 목표는 바로 종말론적인-초월적인 목표이다 : “생명의 면류관”(1장 12절). 여기에서 이미 야고보서의 신앙개념이-비록 특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이지는 않지만-“정적”이 아니고 철두철미 동적이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2. 1장 6절에 따르면 구하는 기도는 “믿음 가운데서(ἐν πίστει) 행해져야 한다. 바로 뒤에 나오는 분사적 부가어 μηδὲν διακρινόμενος(”조금도 의심하지 말고“)는 πίστις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라는 아주 강한 동기가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구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 기도를 듣고 요구된 것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1장 5.7절도 참조하라).
3. 2장 1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람의 외관을 보고 차별대우하는 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접속사 γάρ로써 연결된 그 다음의 본문은 야고보가 어떤 것을 차별대우라고 보는지를 분명하게 해준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의 집회에서 부자들을 특별대우하고 그들을 추켜 세우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가 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모순되는 지를 5절이 말해준다 :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그의 나라의 상속자들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믿음 가운데서 부요한 자들”이라는 표현에서의 믿음은 어떤 불특정한 믿음이 아니라 2장 1절이 언급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πλούσιος(부유한 자, 부자)라는 용어는 πίστις와의 연결로 인해 그 뜻이 변화되어 영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가난한 자들이 갖는 구원의 미래와 관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믿음의 시각이 단연코 종말론적인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이런 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교의 가난한 자들이 예수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을 때만 구약성서적-유다교적인 가난한 자의 경건을 능가한다.
4. 위에서 이미 강조되었듯이 야고보는 “믿음”에 대한 순전히 主知主義的인 이해에 반해 매우 역학적인 신앙개념을 대변하고 있다. 2장 14-26절에서 πίστις와 연결된 동사들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σῴζειν(구원하다), δεικνύναι(보이다), συνεργείν(함께 작용하다), τελειοΰν(완성하다), δικαιούν(의롭다고 인정하다) 등등이 그것이다. σῴζειν과 δεικνύναι은 야고보가 믿음과 인의가 관련됨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즉시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인간의 종말론적인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2장 14절 b :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는가?” 참조). 그밖에도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이란 그 본질을 “증명할 가능성”(불트만)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자명하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웃사랑이라는 실제적인 행동에서 믿음이 “제시됨”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장 18절). 믿음은 사랑의 실천, 하느님에 대한 순종의 행동과 설득력있게 종합(Synthese)될 때에 그 실천력과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완성된다”(2장 22절). 따라서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훈련에 따른” 믿음이 강조된 것은 아니다. 認義에 대한 사고와 아브라함의 예가 갖는 연결성이 믿음에 대한 이런 류의 견해를 금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2장 14절의 구원하는 믿음이 유일신론적인 믿음만(2장 19절 참조)이라거나 그 외의 어떤 믿음이 아니라 2장 1절에서 언급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개념으로써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5장 6절 그리고 예수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인” 신앙개념도 그 근본에 있어서는, 특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
5. 5장 15절에는 병자를 “구원할”수 있는 “믿음의 기도”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πίστις는 일차적으로 고백신앙보다는 기도하는 장로들의 “신뢰의 신앙”을 뜻하는 것 같다. 물론 이 믿음은 주 예수의 도우시는 권능을 신뢰하며 이로써 모든 마술적인 표상들과는 거리가 멀다.
6. 믿음과 행동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담론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는 믿음을 따로 다루지 않고 있다. 이 서한은 또한 고백신앙과 신뢰의 신앙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며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이미 알려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믿음이 진정으로 믿음이라 일컬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서한 전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야고보의 “신앙개념”을 특징짓는 것으로 특히 다음과 같은 두가지 점을 들 수 있다. 귀기울여 들으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는 자의 자명한 신뢰와 사랑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믿음의 “증명”과 실천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점은 구약성서와 유다교의 “신앙개념”과 비교해 볼 때 하나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구약과 유다교의 최상의 유산이며 하느님의 권능과 자신의 권세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참조. 마르 2,5 ; 5,34.36 ; 9,23 ; 10,52 ; 11,22-24) 그저 `주여, 주여‘라고 부르기만 하는 자들을 물리친(참조 마태 7,21)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이다.
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이기도 하다” 이는 야고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차적인 대상이 유다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참조 2장 1절)라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πίστις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에서도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유다교의 신앙이해를 결정한다 : 행동으로의 실현, 일상의 聖化가 그것이다. 따라서 유다교의 “신앙개념”이 신뢰라는 요소를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다인은 선한 행실이라는 실천이 없는 믿음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믿는다는 행위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유다교적인 이해에서 믿음은 경험 혹은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사로잡힘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의 행위이며 성취이고, 실현이며 실천이다...이는 실행이라는 악센트를 가진 행위의 능동형이다. 마지막으로 유다인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으로서의 일상적인 삶의 聖化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유다교적인 의미에서 율법제정의 본래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 날마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율법의 멍에 아래 자신을 복종시키는 자는 이로써 일상적인 삶을 거룩하게 하며 전 실존을 성스럽게 한다. 유다교는 神聖의 종교이다.
유다교의 “신앙개념”에 있는 바로 이 세 가지의 기본요소들은 야고보서의 신앙개념에도 나타난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은 특히 신뢰이며(1,6-8) 사랑의 행동에서의 실현이고(1,21-27 ; 2,14-26) 전체 삶의 聖化이다. 맨 마지막에 열거된 요소는 야고보에게 있어서 가령 죄 많은 세속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1,27b), 평화를 사랑하는데(3,18), 주의 뜻에 전 실존을 맡기는 데(4,13-15) 있다. 야고보에 따르면 이는 물론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의 최종적인 계시로서 이해된 복음(참조 1장 21-22절)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에게 있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서한을 통해 유다교의 최상의 유산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한 “이론적인” 종교로 화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다리가 된다. 여기에서는 가톨릭과 신교의 신자들도 함께 대화할 수 있으리라. 야고보서가 신약성서에서 갖는 섭리적인 의미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 이는 우리 시대에 특히 소중하다고 할 수 있겠다.
보론 4. 야고보서의 인간의 認義
인의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구원과 구원의 방법이 문제된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1. 인간이 “구원받아야”한다는 사실은 야고보에게 있어서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성서에서 쓰이는 용어인 σῷζειν(살리다, 구원하다)을 다섯 번이나 쓰고 있다(1,21 ; 2,14 ; 4,12 ; 5,15.20). 이 구절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영혼‘의 구원(1,21),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2,14 ; 4,12), 하느님의 도움을 통해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구원됨(5,15), `죽음으로부터의’ 영혼의 구원(5,20) 등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 용어사용이나 본질에 있어서 구약성서와 후기 유다교의 전승 그리고 신약성서의(다른 문서들의) 구원에 대한 견해에 일치한다.
야고보는 (바울로와는 달리) 인간의 “구원”을 언급할 때 다가올 하느님의 심판 때의 인간의 인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특히 2장 14절 참조 :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는가?”, 즉 심판 때에). 그러나 2장 24절의 현재형 δικαιούται(“인간이 의롭다 인정받다”)를 보아서는 이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야고보가 다가올 인의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의보다 더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게도 현재 일어나는 인의와 미래에 올 인의사이의 긴장이 남아 있다.
2. 인간의 구원자는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이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그로부터 온다(1,17). 이로써 “온갖 좋은 선물”의 원칙적인 출발점이 강조된다. 즉 모든 좋은 선물은 하느님에게 놓여 있다. 따라서 1장 18절에서 하느님이 인간의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인격적인 근원자로서(ἀπεκύησεν ἡμάς : “그분이 우리를 낳으셨다”) 내세워지고 그의 절대주권이(βουληϑείς : “그는 뜻을 정하시고”), 4장 12절의 ὁ δυνάμενος σώσαι καὶ ἀπολέσαι[우리를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멸망시킬 능력도 있으신 분] 참조)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은 17절의 견해가 일관성 있게 관철된 것 뿐이다. 이로써 인간의 새 창조가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역사로서 인정되고 선포되었다. 야고보에게도 자기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병자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시다(5,15). 그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1,12). 인간은 이 때 단지 이를 받아들이는 자일 뿐이다(λήμψεται). 그는 자기의 영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며 “더 큰 은혜”를 허락하신다(4,5-6). 그는 가난한 자들을 그의 나라의 상속자들로서 “택하신다”(2,5). 겸비한 자들을 “높여주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다(4,10). 야고보에 따르면 하느님은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3. 새로이 창조하고 구원하는 하느님의 능력은 야고보서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특별히 주목할 일이다. 1장 18절(“그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과 1장 21절(“여러분의 영혼은 구원할 능력이 있는 심어진 말씀을 받아 들이라”)을 참조하라. 이것들은 상당히 “바울로적으로” 그리고 “요한적으로” 들린다!
4. 야고보는 믿음에 의롭다 인정받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격리된” 믿음, 믿음만이 “홀로” 인간을 의롭다 인정한다는 것을 결단코 부인한다. 그런 믿음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2,14). 믿음은 사랑의 행동과 “함께 작용할 때”(2,22) 그리고 사랑의 행동에서 살아있음이 “보여질” 때(2,18) 진정한 믿음으로서 증명된다. 이러한 구체적인 증거없이 믿음은 認義를 위해서 “무익하며”(2,20) “죽은” 것이다(2,17.26). 그러나 야고보가 믿음에 반해 (사랑의) 행동만을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써 내세우려 한 것은 아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살아있는 믿음(fides viva)이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머물지 않고 자비로운 행위에서(2,16.25)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함에서(2,21) 보여지는 믿음인 것이다. 하느님에게는 순종하고 이웃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이 “행동”을 통해 믿음은 “완성”되며(2,22) 믿음이 의롭다 인정받게 하는 능력을 갖는다고 한 성서의 약속이 이루어진다“(2,23) 살아있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므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여러분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것이고 믿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2,24). 여기에서 항상 염두에 두어져야 할 것은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오직 행동만“이라든지 ”오직 믿음만“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은 그에게서 있을 수 없다.
5. 야고보서의 인의론은 전승된 표상들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으며 유다교의 최상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믿음과 행동의 관계 그리고 인의의 과정에서 이 둘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담론은 야고보서의 의인론이 갖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신학사에서도 간과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바울로의 인의론과 “모순되는 점”이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 바울로와 야고보는 인간의 인의에 있어 믿음과 행동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모범적인 답변은 다음과 같다 : “전자(바울로)는 믿음에 앞선 행동에 대해 말하고 후자(야고보)는 믿음에 따르는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야고보는 2장 14-26절에서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ἐὰν πίστιν λέγη τις ἔχειν]) 이제 믿음을 가지게 될 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외에도 귀신들도(야고보서 2장 19절에 따라) 가지고 있는 죽은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는(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따라), 의롭다 인정받게 하는 믿음을 구별하고 있다 : “사도(바울로 : 역자주)가 `우리는 사람이 율법적 행위에 상관없이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확신한다‘(로마 3,28)고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인간이 악하게 살면서 좋은 행동을 안 해도 그에게는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사도가 주장한 줄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는 사도 바울로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는 다른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오히려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갈라 5,6). 바로 이 믿음은 하느님을 믿는 자들을 더러운 귀신들로부터 구별하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사도 야고보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귀신들)도 `믿고 무서워 떨지만‘(야고 2,19) 좋은 행동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의인의 삶의 근거가 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의인의 : 역자주) 이 믿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하며 이로써 하느님은 그에게 그의 행동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다”(Homines autem non intelligentes, quod ait ipse Apostolos, `Arbitramur justificari hominem per fidem sine operibus legis'(로마 3,28), putaverunt eum dicere sufficere homini fidem etiamsi male vivat et bona opera non habeat. Quod absit ut sentiret Vas electionis: qui cum dixisset quodam loco..., `sed fides quae per dilectionem operatur'(갈라 5,6). Ipsa est fides quae fideles Dei separat ab immundis daemonibus: nam et ipsi, sicut dicit apostolus Jacobus, `credunt et contremiscunt'(야고 2,19) ; sed non bene operatur. Non ergo habent istam fidem ex qua justus vivit, id est, quae per dilectionem operatur, ut reddat ei Deus vitam aeternam secundum opera eius).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해결책은 후대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서는 특히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 735년 사망)를 들 수 있겠는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그는, 바울로와 야고보, 이 양자 모두의 의견대로 따르면 아브라함이 믿음에서나 행동에서 완전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책을 약화시켰다. 베다는 바울로와 야고보가 각자의 독자들을 고려하여 자신의 독자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덕목들을 특별히 강조했다고 주장한다(“Sciebant namque ambo quia Abraham et fide et operibus erat perfectus, et ideo quisque eorum illam magis in eo virtutem praedicavit, qua suos auditores amplius indigere perspexit").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서 3장 28절과 야고보서 2장 14절 이하 사이의 “모순”을 인의 이전의 행동과 인의 이후의 행동으로 구별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이에 대한 루터의 경전비판적인 “해결책”은 신교신학에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딜렘마를 벗어나 하나의 긍정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적지 않다. 여기에서는 그 중 두 개의 시도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라크만(M. Lackmann)은 그의 연구논문 “오직 믿음으로만, 야고보서 2장과 개혁교회의 인의론에 대한 주석적인 연구”(SOLA FIDE. Eine exegetische Studie uber Jakobus 2 zur reformatorischen Rechtfertigungslehre)에서 이 문제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슐라터가 이 문제에서 “결정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지적하였다. 라크만에 따르면 루터는 “자신의 견해인 `오직 그리스도만‘(Christus solus)과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타당성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의문시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였고 그의 뒤를 따른 전체 개혁교회의 신학도 역시, 이와는 상당히 다른 결정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인하지 않았다. 루터는 사도 야고보의 서한에 제시된 인의와 믿음에 대한 증거에 복종하지 않았다”. 라크만은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원시교회의 긴장 가운데서의 일치야말로 “신교와 구교의 완벽한 해결책이며 옛것의 진정한 개혁이고,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영원히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르려고‘ 투쟁하는 `현대의’ 인간이 제시하는 물음에 대한 온전한 답변”이라고 본다. 그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야고보서의 요청에서 동시에 개인적인 실존에 대한 복음의 요청을 본다. 이는 중요한 견해로서 계속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히홀츠(G. Eichholz)도 그의 논문 “바울로와 야고보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동”(Glaube und Werke bei Paulus Und Jakobus)에서 주목할 만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바울로로부터 출발하면” 야고보의 언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신학적으로 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된다.” 야고보는 자신과 바울로 사이에 놓여있는 “모순”을 밝혀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은 “처음부터” 행동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행동을 통해 확증되며, 믿음이 행동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야고보의 근본적인 관심사이다.” 그는 말씀을 “동시에 명령(Weisung)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은 듣기만 하는 자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야고보는 실제적인 행동과 “믿음”의 “갈등”이라는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간파함으로써 “실존의 그리스도교”가 상실된 위험을 본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야고보는 신앙의 개념을 이론화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그저 믿음에 만족하고 행동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를 거부하는 믿음을 공박한다”. 따라서 “오직 믿으로만”은 그에게 있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믿음”이 인간은 구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야고보는 오직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아이히홀츠는 서한의 관건을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야고보에게는 사랑의 실천에서 진정한 믿음임이 증명되는 그런 믿음만이 의롭다 인정된다. 바울로의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가르침(sola-fide-Lehre)이 신학적으로(그리고 실천적인 면에서도) 오해될 위험에 늘 처해 있으므로 야고보서의 이 인의론은 양도할 수 없는 “평형”(Gegengewicht)으로서 역할한다. 그리스도교가 건전하게 유지되려면 야고보서의 이 인의론이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보론 5. 바울로와 야고보의 “행함”
Ⅰ. 바울로 신학에서의 “행함”(용어사용 면에서)
바울로의 서한들(사목서간들도 포함하여)에서 ἔργον(행함, 일)이라는 용어는 매우 자주 나온다(전체 67회, 그중에서 20회는 사목서간들에 나온다). 해당되는 모든 구절들을 표면적으로만 살펴보아도 ἔργον이 갖는 의미의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목서간들에서는 ἔργα ἀγαϑά(선한 행실)와 ἔργον ἀγαϑόν 대신 ἔργα καλά(착한 행실)와 ἔργον καλόν이 쓰이고 있으므로 그 외의 전체 바울로서한(Corpus Paulinum)과 용어사용 면에서 구별된다. 따라서 사목서간들은 별도로 다루어진다.
1. 원래의 바울로서한에 나타난 “행함”
1) 율법의 준수로서의 ἔργα.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율법의 준수”가 인의의 과정에서 갖는 역할에 대한 바울로의 판단은 그의 신학과 선포에 있어서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바울로에 따르면 율법의 준수는 인의를 위해 더 이상 아무런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으며, 또 가진 적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의 요구들이 생명을 가져다 준다고는 하지만 이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길인 바, 이 길은 율법준수와의 종합(Synthese)을 허용하지 않는다 : “인간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이 표현(율법준수 혹은 율법적 행위에 대해서는 로마 3, 20.27 ; 4, 2.6 ; 9,11.32 ; 11,6 ; 갈라 2,16(3회) ; 3,2.5.10 ; 에페 2,9 등등을 참조하라. ”율법의 준수“라는 이 표현이 오직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쓰이고 있음은 이 서한들의 특수한 주제설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2장 15절도 이 맥락에 속하는데, 여기에서 바울로는 이방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율법의 요청이 씌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에서는 위에서 열거된 구절에서는 볼 수 없는 단수 τό ἔργον(τού νομού)가 특히 눈에 띄는데,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요청된 ”행동“이다. 이는 이방인의 마음속에 씌여져 있으며 양심이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2) 선한 행동 (ἔργον ἀγαϑόν)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는 일곱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 ① 로마서 2장 7절 (“인내 가운데서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앞에 나온 시편 62편 13절의 인용구절(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시리라”)과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로마서 2장 7절의 진술은 시편 귀절의 의미를 율법의 장중한 문체로“ 긍정적으로(8절에서는 부정적인) 전개시키고 있다. 어쨌든 로마서 2장 7절의 ”선한 행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뜻한다. ② 로마서 13장 3절(”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통치자가 두려울 것이 없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만 두려움이 된다“). ③ 고린토후서 9장 8절(”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은총을 풍성하게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하여 너희는 ... 온갖 좋은 행실을 충분히 행할 수 있으리라. ④ 에페소서 2장 10절(“선한 행동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다” : 이 구절은 “선한 행동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한 유일한(사목서간을 제외하고) 곳이다. ⑤ 필립비서 1장 6절(“우리 안에서 선한 행동을 시작하신 분”) : 여기에서 “선한 행동”은 하느님께서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교회들 안에서 세우신 바로 그 역사로서 첫날부터의 복음에의 분깃이다(5절). ⑥ 골로사이서 1장 10절 (“너희가 온갖 선한 행동에서 열매를 맺기를”) ⑦ 데살로니카후서 2장 17절(하느님께서 “모든 선한 행동과 말 가운데서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기를”) “모든 선한 행동과 말”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모든 표현들이다. 골로사이서 3장 17절도 여기에 속한다(“말 혹은 행동에서”)
에페소서 2장 10절에서만 “선한 행동들”이라는 복수형이 쓰이고 있긴 하지만 골로사이서 1장 10절과 데살로니카 후서 2장 17절에 나오는 “복수의 기능을 가진” 단수 πάν ἔργον ἀγαϑόν(“모든 좋은 행동”)은 바울로가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외적 표현들의 충만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튼 여기에서 바울로가 복수형 ἔργα의 사용을 거의 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이는 아마도 “행동”이 “유다교주의”(Judaismus)적인 의미로 오해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인 것 같다. 갈라디아서 6장 4절(“각자 자신의 행동을 살피라”)에서 τὸ ἔργον 은은 인간의 전체 행실을 뜻한 것으로써 양심이라는 법정에 예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일 수도 있다.
3) 악한 행동들 : 로마서 13장 12절(“어둠의 행실들을 벗어버리자”) 이 행실들은 옛 세대의 특징들이다. 13절에는 이 행실의 보기들이 열거되어 있다 : 열락과 술주정, 음란과 방탕, 싸움과 시기 등. 갈라디아서 5장 19절(“육적인 행동들”. 이는 다음 구절들에 열거되어 있다). 에페소서 5장 11절(“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행실에 끼어들지 말라”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좋아한다). 고린토전서 5장 2절도 여기에 속한다(“이러한 행동[수치스러운 음행]을 한 자”)
4) 하느님과 주 예수께서 하시는 `일‘ : 로마서 14장 20절(“음식 하나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 리츠만(Lietzmann)은 “하느님의 일”이란 곧 교회라고 본다. 미헬(O. Michel)에 따르면 이는 “구원사건”, “예수의 십자가”이다. 바울로가 전후 문맥에서 구체적인 교회를 보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일”은 여기에서 하느님이 복음의 선포를 통해 교회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가리킨다. 고린토전서 15장 58절(“항상 주님의 일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라”) ; 16장 10절(디모테오는 “주님의 일” 즉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의 일을 “하는 자”이다. 이 일을 위해 디모테오는 선교사로서 일한다. 그리고 이 주님의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풍성한 열매를 가져온다). 필립비서 2장 30절에 따르면 에바프로디도는 “주님의 일”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던졌고 “거의 죽는 데까지 이르렀다.” 위의 마지막 두 구절은 다음에 나올 용어 사용법을 이미 시사해주고 있다.
5) 사도적-선교적인 “일”로서의 ἔργον : 로마서 15장 18절 b ("말과 행동으로 이방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 이는 사도의 선교활동을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이를 행하셨다는 것 외에 나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18절 a]는 사도 바울로의 확신 가운데서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19절] 이루어졌다). 고린토전서 3장 13-15절(ἔργον이 4회나 쓰이고 있다)도 여기에 속한다. 이 구절에서는 선교적인 ”업적“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 업적은 심판의 날에 있을 ”불“로 그 존립과 진가가 시험된다. 또한 고린토후서 11장 15절도 참조하라(사도의 적대자들의 최후는 ”그들의 행실에 따라“ 결정되리라). 그렇다. 교회 자체가 ”주 안에서의“ 사도의 ”일“이다(고린토전서 9,1). 바울로는 교회와 같이 있을 때도 그가 서신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행동을 통해“ 단호하고 용감하게 나설 수 있다(고린토후서 10,11) 필립비서 1장 22절 : 바울로는 하늘에 계신 그의 주님 곁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내가 (아직) 육신에 머물러야 한다면 이는 내게 있어서 열매가 풍성한 일(καρπὸς ἔργον)을 뜻한다.“ 선교를 위한 ”일“은 시작되었고 또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사도는 그가 더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면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되기를 바라고 있다. 일의 ”열매“라는 표상은 아마도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 ”열매“는 언젠가 영원의 창고에 넣어져야 하리라. 데살로니카의 교인들은 교회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하는 일(교회를 지도함)을 생각하여 특별히 알아주어야 한다(데살로니카 전서 5장 13절) 그리고 에페소서 4장 12절에 따르면 성도들은 봉사의 일 (ἔργον διακονίας)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교회를 ”섬기는“ 일(과제)이다.
6) ἔργον πίστεως(“믿음의 행위”) 이 두 단어가 연결되어 나타나는 곳은 데살로니카 전후서이다. : 데살로니카 전서 1장 3절(여기에서는 관사와 함께 쓰인다 : 우리는 너희의 믿음의 행위를 기억한다) 이 “믿음의 행위”를 사도 바울로는 “사랑의 수고”와 “희망 가운데서의 인내”와 함께 열거하고 있다. 이는 눈에 보이는 행위를 가져왔고 여전히 그러한 즉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후서 1장 11절에서, 하느님께서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믿음의 행동(ἔργον πίστεως)을 “그의 권능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즉, 종말론적인 완성에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믿음의 행동”은 우선적으로 교회 내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하느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행동”이다. 물론 이는 교회의 활발한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7) “행동”과 심판. 바울로는 행실을 따라 내려질 하나의 심판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2장 6절(“그분께서 각 사람에게 그[율법에 의해 요구된] 행동에 따라 갚으시리라”)을 제외하고는 심판개념은 그 어느 곳에서도 ἔργον이라는 용어와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2장 6절에서는 한 인용구(시편 62,12)가 쓰이고 있는데, 문제는 사도 바울로가 이 인용구와 2장 7절 이하의 상론을 통해 그리스도교 이전의 입장을 전달하고자 하는가이다. 심판의 개념이 사도 바울로의 선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ἔργον과 심판이라는 개념의 연결을 의도적으로 피하였던 것 같다. 이로써 그는 너무도 쉽게 생겨날 수 있는 자신의 認義論과의 모순을 방지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설교용어 가운데서 선하고 악한 “행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은 위에서 충분히 드러났다(위 2)와 3)항). 또한 그는 악한 행실에 처벌이 내려지리라는 경고도 하고 있다(데전 4,6 ; 에페 5,5-6 ; 골로 3,6 ; 고전 6,9-10 ; 고후 5,10 ; 갈라 5,21 ; 6,7-10 ; 로마 14,10-12 등을 참조하라). 따라서 유다교의 “율법의 준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바울로의 견해에도 긴장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긴장은 그의 신학에 있는 서술법과 명령법의 저 긴장과 본질적으로 관련된다. 사도 바울로가 ἔργον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용어사용이 매우 다양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ἔργον(ἔργα)이라는 용어를 ἔργον τού νομον라는 표현과 이에 연결된 신학 - 이 신학이 바울로의 사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해도 - 에 곧바로 연결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2. 사목서간들에 나타난 “행동.”
사목서간들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그 외의 바울로 서한 전체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그대로 증명해준다. 특히 용어사용에 있어서의 다양성이 사목서간들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사목서간들에서는 ἔργα ἀγαϑά(ἔργον ἀγαϑά) 대신 (τὰ) ἔργα (τὰ) καλα(복수형으로만 쓰임 : 7회)가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ἔργα ἀγαϑά는 “선한 행동”으로 ἔργα καλα는 “훌륭한 행동”으로 번역될 수 있다). “율법의준수”라는 표현은 한번도 쓰이지 않았으나 “업적주의”(Leistungsprinzip)를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한 구절은 있다(디모테오후서 1장 9절 :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 디도서 3장 5절(“우리가 행한 의로운 업적 때문이 아니라” 등 참조) 따라서 바울로의 생각이 여기에서도 살아 보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한(훌륭한) 행동”은 철두철미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긍정적인 표현이며,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디모테오후서 4장 18절만이 언급하고 있다. 디모테오후서 4장 14절에는 행동에 따른 심판이 선포되고 있다(로마서 2장 6절에서와 같이 시편 62편 12절이 인용됨).
Ⅱ. 야고보서에 나타난 “행위”
ἔργον이라는 용어는 야고보서에 15회 쓰이고 있다(1,4.25 ; 2,14.17.18[3회] 20.21.22[2회] 24.25.26 ; 3,13 ; 그리고 1,4.25에서만 단수로 쓰인다). 1장 4절에 따르면 인내는 온전히 발휘(ἔργον τέλειον)되어야 하는 바 이는 종말론적인 “완전함”(Ganzheit)로서 그리스도인은 이에 도달하여야 한다(“그리하면 여러분은 온전하고 완성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1장 2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자”(ποιητὴς ἔργου)여야 한다. 이는 예수가 요청하였듯이 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김을 뜻한다. 3장 13절에 따르면 행동은 “지혜로운 자”의 삶 속에서 그의 선한 생활을 통해 증거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명백한 “증거”이며, 특히 좋은 본보기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동이란 어떤 것인가? 2장 14-26절의 단락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 여기에서는 ἔργον이라는 단어가 열 두 번이나 쓰이고 있다. 이 행동은 다름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에서 행해지는 이웃사랑으로써 매우 실제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이해되었다. 이 이웃사랑은 열린 눈과 형제의 곤경을 돕는 손을 가졌다. 2장 21-23절의 아브라함의 예는 항상 주어지는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함도 이 “행동”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야고보에 따르면 이 “행동”은 “믿음과 함께” 인간을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한다. 이와는 반대로 행동 없는 믿음은 야고보에 있어서 “죽은” 것이며 認義를 위해 “무익하다.” 바울로도 이를 부인할 리가 없고 오히려 별다른 이의없이 동조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야고보는 “율법의 준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며 이를 생각지도 않음에랴. 야고보는 특히 “행동”이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갖는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견해에 있어 전적으로 예수의 노선을 걷고 있다. :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마태 5,16).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ἔργον이라는 용어가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말의 내용에 적합하지 않다 하더라도 예수는 자주 “좋은 행동”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들을 단호하게 요구하고 있다 : 하느님의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고 “실천”할 것 ; 마태 7,12(“황금률”) ; 7,17.19.20.24 ; 12,50 참조 ; 이른바 최상의 계명에서는(루가 10,25 이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30-37) ; 마태오복음서 내에 있는 심판에 대한 묘사 ; 그 외에도 루가 12,12-14 ; 요한 13,34(사랑이라는 “새로운” 계명)
“행동”으로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는 야고보서의 주장은 “업적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야고보서의 요청들은 예수의 요청들과 일치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도 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신앙”을 절대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교회가 선한 행동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고린후 9,8 ; 골로 1,10 ; 데살후 2,17)
보론 6. 야고보서의 종말론
1. “마지막 시간”인 현재
역사의 마지막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고한 믿음은 5장 8-9절에 있는 두 문장에서 뚜렷하게 표현되고 있다 : ἡ παρουσία τού κυρίου ἤγγικεν(“주의 강림이 가까웠습니다”)과 ὁ κριτἡς πρὸ τών ϑύρων ἕστηκεν(“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십니다”)이 그것이다. 첫 번째 문장이 주의 강림의 시간적인 절박성을 강조하는데 비해 두 번째 문장은 “이미 문 앞에 서 계시는” 심판자의 형상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그분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간은 위협적으로 눈앞에 다가서 있는 종말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현재는 곧 마지막 시간이다. 부자들은 눈이 멀어서 이런 성격을 띤 이 시간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마지막 날에”(5,4) 그리고 다가올 심판의 “도살의 날”(5,5)을 위해 재물을 모으고 있다. 이 도살의 날은 이들의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한 것인가를 드러낼 것이다. 이 재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지리라(5,1-3 ; 참조. 1,10-11).
이렇게 이해된 현재는 믿음을 가진 교회에게 시련(πειρασμοί)의 시간으로써 이 시기에 교회는 인내(ὑποιμονή)하는 가운데 자신을 지켜야 한다(1,2-4.12 ; 5,7-11) 이 역시 현재를 마지막 때라고 이해하는 설교의 전형적인 주제이다. 계시 전승에 따르면 마지막 때는 치열한 시험의 시기이다. 따라서 교회로서는 인내를 키울수 있고 이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다. 야고보서에 대한 주석작업에서 바로 이 종말론적인 성격이 자주 피상적으로나마 지적되고 있다. 서두의 권면들의 주석에서 이미 이를 볼 수 있다 ; 미래형인 παρελεύσεται(“사라질 것입니다”, 1장 10절)와 μαρανϑήσεται(“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1장 11절) 등은 부자들을 향해 내려진 5장 1-5절의 위협적인 경고로부터 살펴볼 때 이미 “종말론적인” 색조를 띠고 있다.
2. 인간 실존의 철저한 한계성
이 마지막 때의 인간 실존의 진정한 상태는 특히 부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에서 표현되고 있다. 부자는 들판의 꽃과 같이 사라지며(1,10) 그가 이룬 사업과 함께 없어진다(1,11 ; 4,14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장 10-11절에 사용된 두 동사 παρερχεσϑαι(“사라지다”)와 μαρανϑήσεται(“시들다”)는 이 지상에서의 실존이 얼마나 헛되며 빨리 지나가는 것인가를 언어 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현재라는 시간의 종말론적 성격은 교회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생을 계획하거나 허풍 섞인 설계를 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4,13-16). 왜냐하면 “(지상적인) 내일”은 교회에게도 숨겨져 있으며 그의 지상적인 실존 역시 철두철미 무상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하느님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미래에로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참조. 특히 1,12.18.21.25 ; 2,5 ; 4,12 ; 5,7-8.20). 그는 특히 다가올 심판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낭만적으로 혹은 공상적으로 선취되지 않는다. 독자들은 오히려 현재의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 진지하게 지적되고 있다.
3. 강림, 심판, 구원
κριτής(“심판자”), κρίσις(“심판”), κρίνειν(“심판하다”)등 이 세 단어는 야고보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가올 심판을 위협적으로 시사하는 구절들에는 위 세 단어 중 어느 하나가 반드시 쓰이고 있다(참조. 2,12 ; 4,12 ; 5,9.12) 심판은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권한에 속한다(4,12). 삶 가운데서 자비를 행하지 않은 자에게는 하느님의 심판 역시 자비롭지 않으리라(2,13) ; 믿음“만이”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2,14). 그러나 자비를 행하였고 이웃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지킨 자는 심판 때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리라. 그러면 “자비는 심판을 이기리라”(2,13 ; 참조. 5,11).
심판자가 “이미 문 앞에 서 계시며” 그는 강림하실 주와 동일한 분이다(5,8-8). 그럼에도 야고보서는 “형제들”에게 재림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예언자들이나 욥과 같이 “인내”와 “끈기”를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5,7-11). 그러나 야고보서는 재림의 “지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야고보서는 그의 종말론적인 가르침 가운데서 긍정적으로 교회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으며 또한 하느님에 의해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1,12)이 교회에 주어지리라고 약속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그 나라의 상속자”라고 보며(2,5) 앓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확약한다(5,15). 그리스도교회는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첫 열매”이다(1,18).
이와 같이 야고보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전 실존은 철저하게 구원(생명)이냐 심판이냐 라는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다.
4. 종말론과 윤리
야고보서에 있어서의 종말론과 윤리의 밀접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서한의 윤리적인 동기를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특히 다가올 심판에 대한 위협적인 시사가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장 1절에서는 선생이 되려는 욕심이 경고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선생에게는 “더 큰 심판”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4장 11절과 5장 9절에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시사와 더불어 이웃을 비난하는 행위가 경고되어 있다. 교회는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5,12) 말을 할 때 전적으로 진실해야 한다. 부자들의 사악한 反사회적 행위에는, “마지막 날들에” 축적된 그들의 재산과 그들까지를 모두 멸절시키는 무서운 심판이 내려지리라고 위협되고 있다(5,1-5).
거꾸로 긍정적인 종말론적인 동기설정도 결여되어 있지 않다. 1장 12절의 축복의 말에는 시련 가운데서 견뎌낸 자에게 하느님에 의해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이 확약되고 있다. 말씀을 결연히 “행동에 옮기는 자”에 대한 1장 25절의 축복의 말 역시 분명하게 종말론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참조. 미래형 ἔσται!) 1장 21절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과 윤리적인 결단이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2장 5절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나라”의 상속자로 택하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촉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를 구원의 미래에 “높이실 것이다”(4,10). 그릇된 길로 빠진 형제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일은 “(종말론적인) 죽음으로부터의 그의 영혼의 구원”과 연결되고 있다(5,20). 교회는 이 시기의 고난을 가까이 다가와 있는 주님의 강림을 생각하여 인내와 끈기로써 견뎌내어야 한다(5,7-11). 그리고 2장 14-26절에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인간인 인의를 근거로 하여 사랑이라는 행동과 하느님에 대한 복종 가운데서 믿음을 생동적으로 지키라는 요청이 근본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1장 4절의 목표설정(“여러분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하고 완성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이 이미 종말론적인 “완성”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윤리적인 가르침은 그 동기를 스토아의 윤리와 같이 “자연적”인 완성의 교리에서가 아니라 종말론에서 발견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의 윤리적인 요청들과 유사한 내용의 몇몇 요청이 야고보서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종말론적인 동기설정을 부인할 수도 없다. 야고보서의 윤리는 하나의 “중간윤리”(이 용어가 지닌 최상의 의미에서)인 바, 이는 저자가 갖고 있던 그리고 그가 자신의 독자들에게서 불러 일으키고자 한, 분명한 종말론적 자각에 일치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가까이 온 하느님의 심판을 견뎌내고 그의 약속에 참여하기 위해 “그 사이에” 즉 이 마지막 날들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인내(ὑπομονή)를 가지라는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으로, 정적으로 기다리라는 권면은 교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오히려 “말씀”의 근본적인 실현이라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에로 부름받고 있다. 이는 바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1장 19절 이하에 나온 말씀을 실천하라는 요청에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새 창조에 대한 지적이 선행되고(1,18!)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로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야고보에게 있어서도 행동은 새 창조(καινὴ κτίσις)의 표징이다.
야고보서의 종말론에 관련하여 요약하는 의미에서 아래와 같은 사실이 언급될 수 있다.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들어있지 않다”는 디벨리우스의 명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신학”이라는 개념 속에 “그리스도론”만을 포함시킨다면 야고보서에는 물론 신학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신학이 본질적으로 “종말론”이기도 하다면 야고보서는 신약성서에서 종말론을 증거하는 여러 문서들에 속한다. 거기다가 야고보서의 종말론은 예수의 종말론과 매우 가깝다(윤리적인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왜냐하면 예수도 마지막 때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그의 종말론적인 선포에도 심판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도 어떤 일정한 시기를 지칭함이 없이 자신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은 그의 제자들에게 확증이 시기인 것이다. 그의 윤리적인 가르침 역시 종말론적인 동기설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실존에 대한 이해”도 그의 종말론적인 선포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야고보서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 서한으로서, 전승된 권면적인 격언지혜의 수집 이상의 어떤 것이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종말론이다.
보론 7. 맹세금지에 대하여
1. 구약성서와 후기 유다교에 있어서의 맹세
구약성서에 따르면 맹세는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레위기 19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엄격하게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 “너는 내 이름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나는 야훼이다.” 민수기 30장 3절 : “누구든 야훼께 서원 하거나 맹세를 했을 경우... 자신의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말한 그대로 낱낱이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야훼를 두고 행해지는 맹세만이 허락되고 그럼으로써 이 맹세가 진정한 하느님에 대한 하나의 고백이기 때문에(이사 19,18 ; 48,1 ; 예레 12,16) 거짓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그의 이름을 악용하는 행위이다(출애 20,7). 예언자들이 이미 맹세의 남용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예레 5,2 ; 즈가 5,3-4 ; 말라 3,5). 그리고 집회서 23장 9.11절은 맹세를 근본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 “네 입에 맹세하는 버릇을 들이지 말고 거룩하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을 삼가라! ... 수없이 맹세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죄를 쌓고 있을 뿐으로 형벌의 채찍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경솔하게 그른 행동을 한다면 죄가 그에게 쌓일 것이며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이는 두 번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거짓 맹세를 하면 죄책을 면할 수가 없으니 이는 그의 집안에 재앙이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 유다교에서는 누구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맹세라는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언제나 진실하기를 배워서 말 그 자체가 맹세로 간주될 수 있다면 맹세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고 유익하며 현명할 것이다. 흔히 말해지는 `차선책‘은 진정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맹세하는 자는 그를 믿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의심을 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세를 할 때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행해야 하리라. 자꾸 미룸으로써 맹세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만일 꼭 맹세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이 상황에서 고려되어야 할 모든 사항들을 조심스럽게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습관상 사소한 일로 취급되는 일이라도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맹세란 약간 의심스러운 일들 가운데서 행해지는 하느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일을 위해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도 방자한 행위이다”.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쁜 습관 때문에 만사에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맹세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일에도 자신들의 언사의 공허한 주자들을 맹세를 통해 뒷받침하려든다. 그들은 말의 홍수를 멈추에 하거나 완전히 침묵해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맹세가 잦으면 거짓맹세와 反神的인 행위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에쎄네파는 맹세를 금지하였다 :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은 맹세보다 더 강하다(ἰσχυρότερον ὅρκου). 그들은 맹세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를 거짓맹세보다 더 나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요세푸스). 수도승만은 수도원에 입단할 때 매우 엄격한 의무를 지우는 수도원의 모든 규칙들을 지킬 것이라는, “소름끼치는 맹세들”(ὅρκους...ϕρικώδεις)을 해야 한다. 다마스커스에서는 법정에서의 서원을 허락하면서 세세한 지침들을 주고 있다 : 법정 바깥에서는 서원해서는 안된다 ; 서원시에는 하느님의 이름과 토라가 언급될 수 없다 ;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맹세는 파기될 수 없다. “한 여자의 서원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서원을 무효로 만들어야 한다‘(민수 30,9) : 만약 하나의 서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경우 이 서원을 파기해서는 안 된다”.
미쉬나(Mischna)가 쓰여지던 시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서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증거서원” “공탁서원” 재판관의 서원 등이 그것이다. 후기에는 여기에 소위 라삐의 서원이라는 것이 첨가되었다. 라삐들은 만사에 서원을 가지고 하나의 진술을 뒷받침하려는 경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출애굽기 20장 7절을 근거로 하여 야훼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금지된 이래로 하느님의 별칭들로 서원이 행해졌다. 즉 아도나이(Adonai), 샤다이(Schaddai), 제바웃(Zebaoth), 쉠(Schem), 크신 분, 경이로운 분, 찬란한 분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하늘을 두고”, “성전을 두고”, “성전예배를 두고”, “계약을 두고”, “토라를 두고”, “모세를 두고”, “맹세를 두고”, “(너의) 생명을 두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지 않겠다”, “내 자식들을 잃기까지 하겠다” 등등이 사용되었다.
마태 5,33-37 |
야고 5,12 |
33 또 `거짓맹세를 하지 말고 내가 주께 맹세한 것은 다 지키라‘고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 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 라. 하늘을 두고도... 35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네 머리를 두고 도... 37 너희는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라. 여기서 지나치는 것 은 악에서 오는 것이다. |
12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다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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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33-37 |
야고 5, 12 |
πάλιν ἠκούσατε ὅτι ἐρρέϑη τοις ἀρχαίοις ουκ ἐπιορκήσεις, ἀποδώσεις δὲτῷ κυρίῳ τους ὅρκους σου· μὴ ὀμόσαι ὅλως· μήτε ἐν τῷ οὐρανῷ...μήτε ἐν τῇ γῇ...μήτε εἰς Ίεροσόλυμα...μήτε ἐν τῇ κεϕ-αλῇ σου ὀμόσῃς...ἔστω δὲ ὁ λόγος ὑμών ναὶ ναὶ, οὔ δὲ περισσὸν τούτων ἐκ τού πονηρού ἐστ-ιν. |
προ πάντων δέ ... μὴ ὀμνύετε, μήτε τὸν οὐρανὸν μήτε τὴν γήν μήτε ἄλλον τινα ὄρκον· ἤτω δὲ ὑμών τὸ ναὶ ναὶ, καὶ τὸ οὔ οὔ, ἵνα μὴ ὑπὸ κρ-ίσιν πέσητ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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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본문과 야고보서 본문의 차이 :
1) 마태오 복음에는 분명히 주의 말씀이 실려 있으나 야고보서에는 인용문이라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2)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그러나 금지된 맹세 양식의 예로서 야고보서에는 마태오 복음에 실린 것들 중 두 개만(하늘, 땅)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근본적인 맹세금지가 지시되고 있다(마태오 복음에서 와 마찬가지다 :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3) 야고보서에는 금지된 맹세를 하였을 경우(혹은 정직성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가 실려 있는데 비해 마태오 복음서는 이를 “악”(마귀?)에서 나온 것이라고 성격짓고 있다.
4) 맹세에 관한 계명 자체를 살펴볼 때 야고보서에는 ὁ λόγος가 빠져 있다. 그 대신 각각 처음에 나오는 ναὶ와 οὔ앞에 관사 τὸ가 붙어 있다.
야고보가 맹세금지를 주의 말씀으로 인용하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 5장 33-37절과의 비교를 통해 맹세금지가 그리스도교의 영역에서는 예수에게로 소급된다는 것이 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첫째, 이 두 전승의 형태 가운데 어느 것이 원래의 형태에 더 가까운가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전승은 교리적으로 보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마태오 복음 5장 37절a에서 전적인 정직성이 요구되고 있는지(야고보서에서 처럼) 아니면 하나의 서원양식이(표면상으로 예수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것인지도 물어야 한다. 쿠취(E. Kutsch)는 고대동방(아카디어)의 자료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하였다. 즉, 동일한 불변화 품사(Partikel) 둘이(예를 들어 ναὶ ναὶ) 연결되어 있으면 이는 하나의 진술이 참되다는 것을 가리키며 서로 다른 불변화 품사 둘이 (ναὶ οὔ) 연결될 경우 하나의 진술이 참되지 않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입으로는 “예”가, 마음으로는 “아니오”가 말해지기 때문이다. : “‘너희는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라‘는 계명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금지한 맹세 대신으로 하나의 서원양식을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모든 언사의 품격을 요청하고 있다 : `너희의 말은 결단코 참되어야 한다’”(쿠취). 슈텔린도 이와 유사한 의견을 갖고 있다. : “예수는 맹세의 어떤 다른 대용품을 제공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하고 명료한, 확고한 ”예“ 그리고 ”아니오“를 맹세에 反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이 때문에 ναὶ와 οὔ가 반복되어 쓰였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서에 있는 맹세금지의 형식이 아마도 더 원래의 것이고 야고보서의 그것이 이차적일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제시하는 표현양식은 마태오 복음으로부터 문학적으로 독립된 것이며 맹세금지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데는 어쨌든 훨씬 더 명료하다. 일반적으로는 마태오 복음서를 따르는 유스틴도 여기에서는 야고보서의 표현양식을 따르고 있다. :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너희의 `예‘는 `예’이어야 하고 `아니오‘는 `아니오’이어야 하느니라. 여기에서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결론을 위한 보론/야고보에 따른 그리스도교
야고보서에 드러나는 그리스도교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이 서한은 신약성서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 독자성 또한 극히 명백하므로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다.
1. “야고보에 따른 그리스도교”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야고보가 자신의 의견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특징들을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성격의 “그리스도교”는 결단을 못내리고 망설이며 갈라진 영혼을 가지고 있고 의심한다. 시련이 닥쳐오면 이 그리스도교는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결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욕정들(ἐπιϑυμίαι)에 이끌려 항상 이리저리 흔들린다. 빨리 열광하나-거울속의 자기모습을 재빨리 들여다 보는 사람에 대한 비유를 생각해보라 - 좋은 일에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인내함이 없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에서 믿음은 너무도 쉽사리 잘못된 인물숭배에 빠지는 바,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척도가 아닌 다른 척도가 사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교는 쉽게 反사회적이며 불의한 성격을 띄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를 대변하는 자는 설교를 그저 듣기만 하는 자이다. 그들의 믿음은 이웃사랑이라는 실천적인 행동이 빠진 죽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살아 있는 영혼이 빠져버린 시체와 같다. 이 그리스도교는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하며 궤변을 일삼고 분쟁과 당파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는 중상모략을 즐기고 독선적이며 자신을 가르치게 하는 대신 항상 그저 남을 가르치려고 든다. 이는 세상의 친구이며 세상에 매달린다(“간음하는 자들이여!”) 우리가 이미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늘 깨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방종스럽고 몽롱한 환락이 이를 지배한다. 인생의 계획들은 하느님 없이 세워지는데 이 계획들은 특히 자기만이 부요해 지고자 그리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소유욕을 위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교도는 “명예욕”으로 가득차 있는 바 이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反사회적이고 불의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야고보에 따르면 이 거짓된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2. 야고보에 의하면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시련(πειρασμοί)이 닥쳤을 때 보여지는 인내(ὑπομονἡ)와 참음 그리고 끈기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련은 기쁨으로 견뎌낼 수 있는데 이는 시련 가운데서 믿음의 시금석을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신뢰에 가득 차 있고 어떤 의심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겸비하며 경청하여 가르침을 받을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그들 자신이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될 때 그들의 말씀은 온유와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가득 차 있다. 이 그리스도교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평화에 대한 사랑과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자세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차별대우란 있을 수가 없다. 세상으로부터 멸시받는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이들이 그들의 친구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도 이러한 인간들을 당신의 나라의 상속자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이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과 함께 그 힘을 발휘한다. 행동이 없는 믿음이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이들은 형제들 사이에서 가르치는 자로 행세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경청하기를 즐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혀가 가진 위험성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대변하는 그리스도교는 좋은 열매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과 하늘 나라를 위해 분명한 결단을 내린다. 하느님에 대한 순종은 자명한 것이다. 그들은 성서로부터 많은 예들을 듣고 이를 그대로 닮고자 애쓴다. 그들은 계획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늘 “오직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말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들의 전 실존은 하느님과 그의 성스러운 뜻에 따라 방향 지워지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세상과 하느님이라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을 거부한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기쁨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을 하느님과 관련시킨다. 그들은 정직함을 사랑하며 거짓말과 이웃에 대한 중상모략을 싫어한다. 그들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자신들의 죄를 서로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형제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염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 그리스도교야말로 종말론적인 그리스도교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에 대해 알고 있다. 그들은 항상 다가오는 심판을 생각하며 마지막 날들이 이미 동터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늘 깨어 있으며 세상의 환락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들은 주님의 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인내로써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 이렇게 야고보는 참된 그리스도교와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자체의 진정한 본질을 부인하고 진부한 그리스도교로 전락하지 않을까 몹시 염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세상의 영이 들어와 판을 칠 위험에 놓여 있는 교회들을 그때그때 자신의 권면들을 통해 경고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서한은 오직 권면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신학적인” 부분 역시 윤리적인 동기에 이바지하고 있다. “믿음만으로”(Nur-Glauben)를 내세우는 자들과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로 이 권면적인 의지에서, 마지막 구절까지 철저하게 계속되는 행동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부단한 요청에서 서한의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지가 모든 격언들과 격언들의 나열을 하나의 큰 통일성에로 결합시키고 있으며, 이 통일성이 서한의 독자적인,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특성을 드러내준다. 서한에 들어 있는 많은 격언들과 유사한 것들이 구약성서-유다교, 심지어 이방-헬레니즘의 격언 지혜에서도 발견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가 실제에 있어서는 예수에게 가깝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는 분명 야고보서의 모든 문장을 확증하리라! 야고보서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 야고보는 혈통으로만이 아니라 영에 의해서도 “주의 형제”였다.
4. 따라서 야고보서에 “그리스도교 특유의 것”이 현저하게 빈약하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 야고보가 되풀이하고 있는 산상수훈은 ”그리스도교 특유의 것“, 곧 복음에 속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서한은 그 외의 신약성서 문헌들로부터 따로 떨어져서 읽혀지거나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에 속하는 것 모두를 서술하고자 하지 않는다. 로마서의 선포 역시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속한다. 따라서 E. 슈바이처의 다음과 같은 견해에 동조해야 할 것이다 : ”만일, 야고보서가 로마서에 앞서 쓰여졌다는 보수적인 학파의 견해가 옳다면 이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쓰여진 것은 여전히 따로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바울로의 선포에 이미 접했다면..., 그리고 그가 무엇보다도 바울로의 선포가 얼마나 많은 교회공동체 내에서 오해되고 있는가를 보았다면 모든 것은 새로운 면모를 띠게 된다. 바울로도 그리고 야고보도 단독으로는 전체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또한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이 양자를 모두 [경전에] 수록하였고 이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을 제외하고 어느 한 사람만을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지로 양자 모두가 경청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교의 풍성함이 드러나고 그 효력이 발휘될 수 있다. 바울로와 야고보가 정직하게, 어느 한 사람도 제외됨이 없이 경청된다면 이로써 ”갈라진 형제들“이 만날 수 있는 길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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