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함을 기념하여 세워진 제주표착 기념성당,
제주 정난주 유배 <-- 문화콘텐츠닷컴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과 경주 본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난주(마리아)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로서 숙부의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1년 황사영과 혼인했다. 남편 황사영은 약관 16세에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으나,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처숙인 정약용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박해의 길을 걸었다. 서기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박해의 참상과 순교자 현황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한 외국의 지원을 청원하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를 작성하여 외국으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발송하기 전에 발각되어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으며 그 결과 처 정난주는 제주도에, 아들 경헌은 추자도에 유배되었다.유명한 백서(帛書) 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마리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이기도 한 그녀가 남편을 잃은 뒤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되는 정난주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大靜)에서 관비(官婢)가 되어 천수를 다한 뒤 모슬포(慕瑟浦) 뒷산에 묻힌다. 당당한 모습으로 천주를 증?構?목숨을 바친 남편은 비록 천상의 영복을 누릴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영광이요 환희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에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헌(敬憲)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은 두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마리아)는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추자도 예초(禮草)리 서남단 언덕 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된다. 추자섬에 남은 경헌은 오씨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장성하게 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경헌이 추자도에 떨구어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헌임을 알게 됐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직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어머니 정씨는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 틀림없기에 그의 발자취를 뒤쫓는 순례자의 눈가도 뜨거워지게 된다. 혈혈 단신으로 제주목 관비(官婢)로 신분이 추락하게 된 정씨는 제주의 거친 바람결만큼이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 냈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하고 깊은 믿음의 덕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서울 할머니'라고 불리며 이웃의 사랑을 받았다. 그 후 37년간을 정씨는 오직 신앙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1838년 음력 2월 병환으로 숨을 거두고 이웃들은 그 유해를 바로 이곳 모슬포 뒷산에 묻었다. 비록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마 그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생이소리질에서]]
나무를 바라보면
고요해지는 마음
나무를 향해
건고 또 걷다보면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하늘을 보네
새 소리 들려오니
기도가 따로 없네
행복하여라.
2011. 7. 13 절물휴양림에서
이해인 수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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